[뉴스 분석]평화헌법 거꾸로 가는 日, 핵무장 빗장까지 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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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법에 ‘국가안보 목적’ 조항… 여야 34년만에 슬그머니 삽입
우주활동 군사적 이용도 허용… 국방군 보유 개헌안 이어 노골화

일본이 원자력기본법에 ‘국가의 안전보장에 이바지한다’는 조항을 추가해 파문이 일고 있다. 일본 정치권의 집요한 보수 우경화 흐름 속에 원자력의 군사적 이용과 핵무장의 길을 열었다는 게 일본 언론의 분석이다.

21일 아사히신문과 도쿄신문에 따르면 전날 일본 국회를 통과한 원자력규제위원회 설치법의 목적 1조에 ‘우리나라의 안전보장에 이바지한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또 부칙 12조에 ‘원자력기본법 2조에 원자력 이용의 안전 확보는 국민의 생명과 건강 및 재산의 보호, 환경보전과 함께 국가의 안전보장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항목을 추가한다’고 규정했다. 하위법인 설치법 부칙을 통해 상위법인 원자력기본법의 가장 중요한 조항을 간단히 개정한 것이다. 원자력 기본방침의 변경은 34년 만이다.

슬며시 진행한 조항 삽입 과정도 논란이다. ‘안전보장에 이바지한다’는 문장은 정부가 각료회의에서 결정한 법안에는 없었다. 법안 수정 협의 과정에서 야당인 자민당 요구로 여야가 합의해 뒤늦게 추가됐다. 진보 성향의 도쿄신문은 “원자력기본법 2조는 원자력 개발의 지침이 되는 중요한 조항인데도 중의원(하원)을 통과할 때까지 국회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지 않았다. 공론의 장에서 아무런 논의도 없이 국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뤄졌다”며 “안전보장의 정의에 관한 명확한 설명도 없어, 핵이 군사적 목적에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감출 수 없다”고 지적했다. 아사히신문도 “(핵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재처리 방식을 고수하는 일본이 ‘안전보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국제사회에서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씨가 창설한 지식인 단체인 ‘세계평화호소 7인 위원회’는 “실질적인 (핵의) 군사이용의 길을 열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국익을 해치고, 화근을 남겼다”는 내용의 긴급 호소문을 발표했다. 요미우리신문과 산케이신문 등 일본 보수 성향의 신문은 관련 내용을 일절 보도하지 않고 있다. 이슈화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일본 정부와 정치권은 그동안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 몸이 돼 재무장의 걸림돌을 속속 제거해 왔다.
▼ 日, 북핵-미사일 핑계삼아 재무장 ‘우향우’… 핵 도미노 우려 ▼

“안전보장 정확한 설명 없고 공론화도 안돼” 지적

日정부 파문 커지자 “비핵 3원칙 변함없다” 해명

일본은 20일 원자력규제위 설치법과 함께 통과시킨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설치법 개정안에서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의 활동을 ‘평화 목적’으로 한정한 규정을 삭제해 우주 활동의 군사적 이용을 가능케 했다. 지난해 말에는 무기 수출을 사실상 금지한 ‘무기수출 3원칙’을 완화했다. 전쟁과 군대 보유를 금지한 헌법 9조의 정신과 달리 꾸준히 재무장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자민당은 올 4월 정식 군대인 ‘국방군’을 보유하고 왕을 ‘국가원수’로 규정하는 내용의 개헌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일본의 재무장에 빌미를 제공한 가장 대표적인 요인은 북한의 핵무장과 미사일 발사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일본은 1998년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한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정권 때 1조 엔(약 14조6000억 원)의 미사일방어(MD) 시스템을 도입했다. 2009년 북한이 은하2호 미사일을 발사한 이듬해에는 동적 방위력 개념을 처음 도입한 ‘신방위계획 대강’을 내놓고 잠수함과 전투기 등 첨단무기에 대한 투자를 대폭 확대했다. 간 나오토(菅直人) 당시 총리는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 파견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우주관련법 개정도 북한이 4월 쏘아 올렸다 실패한 은하3호 미사일과 무관치 않다. 일본은 북한의 핵 개발이나 미사일 발사에 대응해 MD의 정밀도를 높이기 위한 정찰위성과 조기경계위성의 연구개발을 추진한다는 포석이다. 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지만 일본 강경 우익 내에서는 북한의 핵무장으로 동북아 비핵질서가 무너졌으므로 일본도 핵무장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세를 얻고 있다.

또한 중국의 군사력과 패권주의가 급속히 확장하고 있는 반면, 일본의 안보를 거의 전적으로 책임지는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경제적, 군사적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도 일본의 위기의식과 재무장 움직임을 부추기고 있다.

일본의 핵무장이 현실화하면 동아시아 핵질서는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대만 필리핀 등 그동안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해온 주변국이 일제히 핵무장에 나서면서 핵무기 개발 도미노가 확산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이 핵무장에 나서는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동아시아 긴장 고조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 데다 미국이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붕괴를 결코 방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 국제사회의 강도 높은 제재도 감수해야 한다.

파문이 확산되자 일본 정부는 이날 원자력규제위원회 설치법이 핵무장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며 진화에 나섰다. 후지무라 오사무(藤村修) 관방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원자력의 군사 전용은 없을 것이다. 원자력의 평화 이용 원칙인 비핵 3원칙(핵무기를 보유하지도, 만들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의 견지에 변함이 없다”고 해명했다. 호소노 고시(細野豪志) 원전담당상 겸 환경상도 “안전보장에 이바지한다는 의미는 (국제 핵안보를 위해) 핵 확산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강조했다.

:: 원자력기본법 ::

원자력의 연구와 개발, 이용의 기본방침을 규정한 일본 원자력의 ‘헌법’으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 주도로 1956년 제정. 일본이 핵무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결정한 최초의 법률로, 비핵 3원칙의 기초가 되는 법. 평화헌법에는 비핵화 관련 규정이 따로 없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일본#평화헌법#핵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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