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파 공개’ 이진삼 “찹쌀가루 챙겨 휴전선 넘어…”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2월 13일 12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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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에 세상 떠난 마누라도 내가 북한에 넘어갔다 온 사실을 몰랐는데…"

얼마 전 언론보도를 통해 1960년대 북파 작전으로 35명을 사살한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된 자유선진당 이진삼 의원은 한사코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이미 오래 전에 기밀유지가 해제된 내용이기는 하지만,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었던 이야기를 굳이 크게 떠들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이 의원이 북파 작전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그의 가족들조차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실제로 2004년에 사별한 부인도 그가 젊었을 때 북한을 들락날락 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으로 사기가 떨어진 군 후배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여러 차례의 간청 끝에 지난 10일 국회 의원회관 집무실에서 어렵게 이 의원을 만났다.

그는 1967년 9월 육군 대위로 609특공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다른 대원 3명과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개풍군에 침투했다. 이 의원과 대원들은 당시 땅 속에 지뢰를 설치하고 있는 북한군과 맞닥뜨려 13명을 사살했고, 이후에도 2차례 북한에 침투해 22명의 북한군을 추가로 사살했다.

이 의원은 1967년 자신의 북파 작전이 '보복응징 작전'의 일환으로 진행된 최초의 작전이었으며, 당시 북한은 수십 차례에 걸쳐 남한 전후방을 침투했었다고 소개했다. 국회 국방위에 보고된 자료에 따르면 공비 도발은 1966년에 57건에서 1967년 118회로 급속히 늘어났다.

그는 44년 동안 숨겨져 있던 군사기밀이 세간에 알려진 이유에 대해 "이미 오래 전에 기밀이 해제된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더구나 2008년 기무사령부 국정감사 때는 기무사령부가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북파 작전 등 자신의 업적들을 모아 자료집까지 만들어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원은 당시 작전 상황을 묻는 질문에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기밀은 해제됐지만 우리 군의 작전과 전략이 상세하게 외부로 알려질까봐 맘이 편치 않다고 했다.

그는 "과거의 일이 알려져 주목을 끌고 스타가 되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면서 "다만 스스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통해 군의 후배들이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어렵게 운을 뗐다.

다음은 이 의원과의 일문일답.

- 44년간 공개되지 않았던 사실을 밝힌 이유는 무엇인가.

"그 부분은 오해를 풀고 싶다. 내가 이번에 처음 공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기밀유지가 해제된 사안이다. 뿐만 아니라 2008년 기무사령부 국정감사를 할 때 기무사령부가 나의 전적을 모아 놓은 자료를 공개했던 적이 있는데 그 자료 중에 내가 북파 작전을 벌인 내용도 담겨 있어 깜짝 놀랐다. 나만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용까지 전부 있더라."

- 작전 기간은 어느 정도였나.

"공중이나 바다를 통해 후방으로 침투하는 방식이 아니었고 추가로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탄약, 수류탄 등 개인화기로만 무장한 채 찹쌀가루 약간만 챙겨서 휴전선을 넘었다. 보통 2~3일 정도가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찹쌀가루 약간만 챙겨 휴전선을 넘었다."

- 3번의 전투에서 3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우리 측 피해는 없었나.

"세 번째 작전에서 적 2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전투가 끝나고 사전에 모이기로 했던 집결지에 갔는데 1명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돌아가려고 했지만 대원들이 끝까지 못가도록 붙잡아서 생사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집결지에서 한 시간 정도 기다리다가 결국 남은 사람끼리 돌아와야 했다. 적의 수류탄 파편에 맞아 희생됐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그때 그 기분은 지금도 뭐라 말할 수 없다. 아직도 그 대원의 이름과 얼굴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 북파 작전을 함께 한 대원들은 모두 북한 무장공비 출신 전향수라고 하던데 사실인가.

"그렇다. 작전을 같이 수행한 대원들은 모두 그해 6~7월에 북한에서 넘어왔던 무장공비들이었다. 모두 6명이었는데 3차례 나는 작전마다 3명씩 데리고 나갔다. 2번 작전을 같이 한 대원도 있고 1번만 했던 대원도 있다. 적을 알고 전투에 임하면 별로 무섭지 않다.

그 6명의 대원들을 직접 훈련시켜보니 원래 내 밑에 있던 우리 군의 사기와 훈련 상태가 오히려 더 낫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작전에 임할 수 있었다.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 군대가 굉장히 훌륭하고 능력도 뛰어난 편이다.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1967년 북한에 침투한 '보복응징' 작전이 북한으로 하여금 68년 1월21일 이른바 '김신조 사건'으로 알려진 북한 무장공비 청와대 침투사건을 유발하게 된 원인이 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는데.

"연관은 없다. 1967년 9월, 10월에 (보복응징 작전이) 끝난 것으로 기억하는데. 북한이 김신조 사태를 일으키려면 한두 달 사이에 준비해 실행한 것으로 볼 수 없다. 1년 이상 계획을 해서 모의 침투 훈련을 포함해 무지무지한 훈련을 했을 것이다. 이미 계획됐던 것이다. 김신조 사태가 있고 난 뒤 1968년 4월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는데. 북한은 그 이후에도 계속 침투해왔다. 그해 11월에도 (공비들이) 침투했었다."

- 남침하는 간첩들만 잡으면 되는데, 굳이 북파 작전을 감행한 배경이 따로 있었나.

"1960년대 후반 그 당시에는 김일성이 대한민국 정부를 어지럽히기 위해 총 역량을 집중했던 때였다. 북한군은 전방, 후방 가리지 않고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중요 시설들을 파괴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등 민심을 교란하라는 지령을 받고 우리에게 잔악한 도발행위를 계속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 쉽지 않은 작전들이었을 텐데 자원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그때 내 나이가 서른 한 살이었고 부인과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철모르고 기어 다니고 있는데 나도 가족들을 보고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그래도 난 늘 국가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왔고 군인은 싸우다가 죽는 것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 최근 천안함 사건이나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등이 잇따르면서 안보 현안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졌는데 군의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

"일련의 사건들이 크나 큰 불행을 가져왔지만 국민들이 안보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점에서 보면, 기회라고 할 수도 있다. 이 기회를 활용해서 안보의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면 앞으로 우리나라의 장래는 없다."

디지털뉴스팀·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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