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파란의 삶, 역사속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8월 19일 02시 56분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헌신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면했다. 6년여의 옥살이, 5번의 죽을 고비와 2차례의 망명 등 숱한 고난을 이겨낸 그는 첫 수평적 정권 교체와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의 주인공이었고,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의 인생 역정은 ‘인동초’라는 별명처럼 고난과 이를 견뎌온 한국 현대사의 한 장이었다. 대통령 퇴임 직전인 2003년 2월 24일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헌신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면했다. 6년여의 옥살이, 5번의 죽을 고비와 2차례의 망명 등 숱한 고난을 이겨낸 그는 첫 수평적 정권 교체와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의 주인공이었고,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의 인생 역정은 ‘인동초’라는 별명처럼 고난과 이를 견뎌온 한국 현대사의 한 장이었다. 대통령 퇴임 직전인 2003년 2월 24일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24∼2009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어제 오후 1시43분 영면… 李대통령 “큰 정치지도자 잃었다”

한국 현대정치사의 핵심 주역으로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8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김 전 대통령은 폐렴에 따른 급성호흡곤란증후군, 혈전으로 폐혈관이 막히는 폐색전증 등으로 인공호흡기로 산소 공급 치료를 받아오다 이날 오후 1시 43분 숨졌다.
박창일 연세대 의료원장은 “폐렴으로 입원했지만 마지막에는 (신장 간 폐 등의 기능이 나빠지는) 다발성장기부전으로 인해 심장이 멎었다”면서 “고령인 데다 생명연장 가능성이 없어 심폐소생술을 실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37일 동안 병상을 떠나지 않고 간호를 해왔던 이희호 여사와 홍일 홍업 홍걸 씨 등 3남 및 민주당 박지원 의원 등 측근들이 임종을 지켜봤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큰 정치 지도자를 잃었다”며 “민주화와 민족화해를 향한 고인의 열망과 업적은 국민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애도했다. 이 대통령은 또 “김 전 대통령의 생전의 뜻이 남북화해와 국민통합으로 이어지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여야 정치권도 일제히 논평을 내고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했다.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김 전 대통령과 50년 가까이 협력 혹은 경쟁 관계를 유지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1997년 대선 당시 근소한 표차로 패배했던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 민주당 정세균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 등 정파를 망라한 전현직 정치권 인사들의 조문 발길이 이어졌다.
김 전 대통령의 일생은 그 자체가 굴곡진 한국 정치의 축소판이었다.
그는 박정희 정권에서 신군부 정권에 이르는 동안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른바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라는 정파를 형성하며 민주화 세력의 양대 산맥을 이뤘다.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싸우다 몇 차례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넘겼다. 일본 망명 중이던 1973년 8월에는 도쿄(東京)의 한 호텔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돼 생사의 기로에 처했다가 살아 돌아왔다. 김 전 대통령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이후에는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미국 정부의 교섭으로 가까스로 석방된 뒤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런 고난을 이겨낸 그는 종종 인동초(忍冬草)에 비유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85년 2·12 총선 직전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뒤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함께 이른바 ‘3김 시대’를 주도했다. 지역주의에 기댄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대통령선거에 4번째 도전한 1997년 정적 관계이던 김 전 총재와의 ‘DJP 연합’을 통해 헌정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며 정치인생의 정점을 맞이했다.
대선에 승리하자마자 당선인 시절부터 외환위기 사태 해결에 매진했고 1년 만에 외환위기 극복을 선언해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햇볕정책’으로 상징되는 대북 유화정책을 펼치면서 김 전 총재와 결별한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6월 평양을 직접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갖는 등 남북화해 무드를 조성한 공로로 그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 초반 정상회담 대가로 거액의 돈을 북한에 건넸다는 ‘대북송금’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는 퇴임 후에도 활발한 강연 활동을 펼치며 민주당 지지층의 구심점 역할을 자임해 왔지만 올 들어 급격히 건강이 악화됐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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