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차례 가택연금… 사형선고… 독재 삭풍에도 굽힘 없이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8월 19일 02시 56분



■ DJ, 시련과 좌절 그리고 영광의 삶

55차례의 가택연금, 6년여의 옥고, 두 차례의 망명, 사형 선고 등 수차례의 죽을 고비….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인생 역정은 ‘인동초(忍冬草)’라는 별명처럼 쉼 없는 고난과 좌절,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와 노벨 평화상 수상, 분단 반세기 만에 남북을 화해로 이끈 남북 정상회담 등도 오랜 세월 역경을 딛고 이뤄낸 결과였다.
○하의도 소년
DJ는 1924년 1월 6일 전남 목포에서 뱃길로 세 시간 떨어진 작은 섬 하의도에서 가난한 소작농 김운식(1974년 사망), 장수금(1972년 사망) 부부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의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다.
생활력이 강하고 교육열이 남달랐던 그의 어머니는 하의초등학교 4학년 때 그를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이후 그는 당시로선 전국 10대 명문 중 하나였던 목포상업학교(5년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일제의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는 해운회사(목포상선)에 취업해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목포상선에 다닐 때 친구의 여동생(차용애·1954년 사망)에게 줄기차게 구애해 결혼했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한때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했다가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탈퇴했다. 그의 건준 경력은 오랜 세월 색깔론에 시달리는 빌미가 됐다. 6·25전쟁 때는 자본가, 반동분자로 찍혀 우익인사들과 함께 목포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는 총살 직전 탈주에 성공해 첫 번째 죽을 고비를 넘긴다.
○정치 입문
1954년 그는 금배지에 도전한다. 동기는 소박했다. 그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국민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가 올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정치권 진입은 쉽지 않았다. 1954년 전남 목포에서 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첫 고배를 마셨다. 강원 인제로 지역구를 옮겨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4, 5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두 아들을 낳은 첫 번째 부인 차 씨와 사별한 것도 계속된 낙선으로 인한 시련 때문이었다.
1961년 5대 인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지만 이마저도 당선 3일 만에 일어난 5·16군사정변으로 의원 등록도 못한 채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정치규제에도 묶였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아래서 그는 ‘평생 동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났고 두 사람은 1962년 결혼했다.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40대 기수, 고난의 시작
그가 정치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63년 6대 총선 때 전남 목포에서 당선되면서부터였다. 1964년 김준연 의원의 구속 동의안 처리 때는 5시간 19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필리버스터(의사진행 지연작전)를 해 화제를 남겼다. 야당 대변인으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치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그는 평생의 경쟁자인 김영삼(YS) 후보를 상대로 대역전극을 펼치며 후보로 지명됐다.
이듬해 7대 대선에서 맞대결을 펼친 상대는 종신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유신체제(1972년)를 구상하던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결과는 95만 표 차의 석패였다. 당시 그는 ‘전투에는 이기고 전쟁에서 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같은 대선 결과는 역설적으로 박정희 정권이 그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1971년 말에는 교통사고를 위장한 살해기도를 간신히 모면했으나 이 사고로 평생 다리를 절게 됐다. 일본 망명 중이던 1973년 8월 그는 도쿄(東京)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전신) 요원들에게 납치돼 동해에 수장당할 뻔한 위기를 겪는다. DJ는 “당시 ‘국민을 위해 아직 못다한 일이 많다’며 살려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후에도 민주회복국민회의 참여(1974년), 3·1 민주구국선언 주도(1976년) 등으로 5년형을 선고받아 수감됐고 이후 석방과 연금이 되풀이됐다.
○망명, 가택 연금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자 DJ는 연금 해제 및 사면복권 조치를 받았다. 대학가에는 민주화 열망이 넘쳤지만 ‘서울의 봄’은 짧았다.

외환위기 극복… 남북화해 물꼬… ‘민주화의 인동초’
대권도전 3전4기 15대 대통령 당선
남북정상회담-노벨평화상 수상 결실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민주세력에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DJ에게는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해 사형을 선고했다. DJ는 유언과 다름없는 최후진술에서 “이 땅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 정치 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
미국 정부의 압력 등으로 무기징역, 징역 20년 등으로 감형됐지만 DJ의 심경은 복잡했다.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1981년 2월 부인에게 보낸 옥중 서신은 당시 심정을 보여준다. “나는 어느새 이불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마구 울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다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1982년 12월 석방된 직후 그는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하지만 미국에 있으면서도 국내에 있던 YS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는 등 반(反)독재투쟁을 계속했다.
○야권 대선 후보 단일화 실패
DJ는 1985년 2·12총선을 앞두고 귀국했다. 2·12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뒤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이끌었고 이를 통해 6·29선언을 얻어냈다. 그러나 첫 대통령직선제 대선에서 그는 YS와의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키지 못했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선에 나섰다. 결국 야권의 분열로 대선은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승리로 귀착됐다. DJ는 1992년에 다시 대선에 도전했지만 YS에게 또다시 패배했다. DJ는 즉각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그는 영국에서 스티븐 호킹 박사의 옆집에 살면서 독일 통일과정 등을 연구하는 등 여유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는 어려웠다.
1994년 귀국해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한 그는 1995년 6월 지방선거 지원 유세에 참여해 조순 씨를 서울시장에 당선시켰고 같은 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며 정계에 복귀했다. 이로 인해 그는 ‘약속 위반’ ‘야당 분열’이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고 15대 총선 결과(79석)도 신통치 않았다.
○대통령 당선, 노벨 평화상 수상
네 번째 대선 도전에 나선 DJ의 꿈은 요원해 보였다. 하지만 1997년 12월 대선 직전 자민련 김종필(JP) 총재와 ‘DJP 연합’을 성사시켰고 결국 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헌정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였다.
당선 직후부터 DJ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아래서 부도 위기에 처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진력해야 했다. 이념과 지향점이 다른 자민련과의 공동 정부라는 태생적 한계, 소수 정권이라는 제약에도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특유의 의지로 국면을 정면 돌파하면서 IMF 관리체제 조기 극복이라는 성과를 도출해냈다.
경제위기가 가닥이 잡히자 DJ는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정책을 추진하며 북한과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2000년 6월 15일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남북 간 대결에서 화해로, 상쟁(相爭)에서 상생(相生)으로 대전환을 이뤄낸 남북 정상회담 성사는 2000년 12월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임기 말은 불행했다. 각종 게이트 의혹과 두 아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는 치명적 결함으로 작용했다. 일생일대의 업적인 남북 정상회담도 현대상선의 ‘5억 달러 대북송금 파문’으로 이어지면서 흠집이 났다.
○자연인 김대중
2003년 2월 24일 퇴임한 그는 재임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정치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오직 국민과 같이 나라가 잘되도록 가능한 정성과 협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만 활동하겠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을 계기로 햇볕정책이 공격당하자 그는 강력히 반박하며 현실정치로 걸어 나왔다. 대선이 치러진 2007년에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으로 쪼개진 당시 범여권의 통합을 주문하는 발언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여전히 민주당의 최대 주주임을 보여줬다.
2009년 5월 23일 후임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다 투신자살하자 김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권의 ‘민주주의 퇴보’를 주장하며 야권 통합과 대여(對與) 투쟁을 독려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전직 대통령의 부적절한 처신’이란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한평생을 한국 정치와 함께해 온 ‘정치 9단’으로선 부득이한 행보였을 것이란 평가도 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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