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강화론, 말보다 정책 앞세우길”

  • 입력 2009년 6월 27일 03시 00분


■ 전문가들 ‘이벤트성 구호’ 우려

좌우 구분대신 상대黨 어젠다 수용
美 클린턴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
부시 ‘온정적 보수주의’가 대표적
“서민-중산층 위한 구체 방안 나와야”

이명박 대통령이 들고 나온 ‘중도강화’의 이론적 근거는 미국에서 차용한 것이다. 미국은 공화당(보수)과 민주당(진보) 간 양당 정치, 정책 대결의 역사가 깊다. 하지만 최근 몇 차례의 미 대선에서 양당은 상대방의 전통적 가치를 흡수해 ‘제3의 길’을 제시하는 전략으로 중도 유권자들을 공략했다. 선거를 하다 보면 유권자들이 점점 중간지대로 모이고, 중간에 서야만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92년과 1996년 대선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민주당)이 채택한 ‘트라이앵귤레이션(Triangulation·삼각화)’ 전략과 2000년 대선 때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공화당)이 내세웠던 슬로건인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가 단적인 예다. 흥미로운 것은 박형준 대통령홍보기획관은 이 대통령의 중도강화론을 트라이앵귤레이션 개념으로,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온정적 보수주의로 각각 설명한다는 점이다.

○ 클린턴의 ‘트라이앵귤레이션’

1992, 1996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클린턴 전 대통령은 세금 감면, 범죄 퇴치 등 공화당의 어젠다를 흡수해 제3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또 보수의 가치로 여겨졌던 ‘성장과 기회’를 강조했다. 이를 통해 중도 성향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면서 집권할 수 있었다. 이는 정치 참모인 딕 모리스가 구상한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트라이앵귤레이션이란 ‘삼각형을 만드는’ 것처럼 삼각형 밑변 좌우의 중간에서 공화당의 정책을 무조건 비판하고 반대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흡수해 융합하는 공세 전략이었다. 좌와 우의 한가운데이면서도 위쪽에 위치한 삼각형 꼭짓점처럼 미래지향적 가치를 제시해내자는 취지였다. 트라이앵귤레이션에서 힌트를 얻은 영국 노동당 토니 블레어 전 총리도 ‘제3의 길(The Third Way)’을 모토로 1997년 집권에 성공했다.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그 중간의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것으로 지나치게 시장경제와 경쟁을 내세우다 보면 빈부격차가 커지는 만큼 소외된 빈곤층 문제를 경제논리가 아닌 사회논리로 풀겠다는 게 골자였다.

○ 부시의 ‘온정적 보수주의’

200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부시 전 대통령은 공화당의 취약 분야였던 교육, 가난, 보건 문제들을 이슈화했다. 특히 진보 진영이 주도했던 교육 분야를 공세적으로 선점해 중도층의 지지를 확보했다. 공립학교에 다니는 서민 가정의 자녀들이 자신이 원하는 사립학교로 전학해 좋은 교육을 받기를 원하면 국가가 이를 보조해주는 ‘바우처 제도’를 도입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보수도 진보 못지않게 교육 평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을 역으로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당시 부시 진영은 공화당의 전통적 가치만 갖고는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경제가 좋아지면서 재정 문제를 시비 삼을 수도 없었고 타도해야 할 좌파 세력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의 가치를 버리지 않되 약자와 소외계층을 보호하는 따뜻한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온정적 보수주의’를 제시한 것이다. 온정적 보수주의는 특히 청년 시절엔 좌파였던 신보수주의자들과의 제휴협력 강화를 세부 전략으로 제시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40대에 진입해 성장과 부(富)에 관심이 많은 386세대를 공략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 전문가들 “중도강화 실체 명확하지 않아”

전문가들은 이 대통령이 내세우고 있는 중도강화의 정확한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특히 이슈를 선점하기에 급급해 구체적인 내용이나 정책 없이 구호만 들고 나온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신율 교수는 “트라이앵귤레이션이나 온정적 보수주의는 정책을 내놓은 뒤 개념을 선보였다. 이로써 (전통적) 지지층에 쇄신, 혁신을 통해 지지층을 넓히는 것이란 점을 납득시켰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중도강화론은 미국의 사례를 모방하긴 했지만 내용적인 뒷받침이 안 됐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이 대통령의 참모들이 구호, 포장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정치컨설팅업체인 포스커뮤니케이션 이경헌 대표는 “이미지메이킹, 구호만 나열한다면 국민의 마음은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라며 “근본적인 교육개혁안,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부동산 정책, 달라진 대야(對野)관을 제시해야만 중도강화의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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