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업인입니까? 정치인입니까?

  • 입력 2009년 3월 23일 02시 56분


헷갈리는 개성공단 입주 기업인들

정치바람 잘날 없는 현실탓에

이윤 추구만으론 생존 어려워

北에 할말하며 갈등해소 노력

“분신할 수 있다” 정부 압박도

“일거리와 일꾼이 오가지 못하면 기업은 망해요. 그럼 개성공단도 죽어요. 또 길을 막을 작정이라면 나는 오늘 당장 짐을 싸서 나갈래요.” “북한 최고지도자께서는 입주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약속을 해 주셨는데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하는 거죠?”

18일 오후 개성공단 내 북한 내각 산하의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사무실에서는 입주 기업인 20여 명이 한 시간 동안 북측 참사(남측 인원을 상대하는 요원) 2명에게 9일 이후 공단 왕래 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북한의 조치에 강하게 항의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A 사장은 “우리는 북한이 2006년 핵실험을 했을 때도, 지난해 12월 1일부터 통행을 제한했을 때도 참았다”며 “그러나 이날 모임에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 북측에 할 말을 다 했다”고 전했다.

21일 개성공단 통행이 정상화되기까지 입주 기업인들은 북한 당국의 결정에 순순히 따르던 과거와는 달리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한 기업인은 “요즘은 우리가 기업인인지 정치인인지 헷갈릴 정도”라고 털어놓았다.

입주기업협의회는 15일과 16일 두 번이나 북한을 상대로 성명을 냈다. 북한이 20일에도 공단 통행을 전면 차단하자 일부 기업의 본사 직원들은 북측이 엿들을 것을 알면서도 공단 내 공장으로 전화를 걸어 심한 욕설을 포함한 성토를 퍼부은 것으로 전해졌다.

기업인들은 남측 당국도 놀라게 했다. 한 당국자는 “북측이 16일 귀환 통행만 허용했을 때 귀환 예정자 중 3분의 1이 스스로 현지에 남은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며 “공단은 남북한 당국이 만들었지만 이제 당국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공간이 됐다”고 말했다.

기업인들은 또 20일 정부 일각에서 ‘개성공단 폐쇄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자 “공단이 폐쇄될 경우 일부 기업인이 분신(焚身)할 수도 있다”며 정부 관계자들을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에도 입주 기업인들은 ‘대립 속의 협력’이라는 두 얼굴의 개성공단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기업적 이윤 추구 외에 정치적 행위자로서 일해 온 것이 사실이다. 기업인들은 북한 근로자 임금 액수와 지급 방식, 3통(통행·통신·통관)과 투자자 보호를 위한 각종 제도를 스스로 고안해 남북한 당국에 건의하는 등 ‘제도의 창출자’ 역할도 했다.

기업인 B 씨는 “개성공단은 남북한 당국이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 우리를 끌어넣은 측면이 크다”며 “하지만 공단을 닫는 것은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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