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 前 국정원장 “김정일 답방, 부시 당선으로 무산”

  • 입력 2008년 6월 9일 03시 01분


“金 ‘대신 러시아에서 만나자’ 제안”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1년 봄 서울을 답방하려 했으나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자 마음을 바꿨으며 김대중 대통령에게 러시아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이 주장했다.

김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 핵심 참모이자 ‘햇볕정책 전도사’인 임 전 원장은 10일 발간되는 회고록 ‘피스메이커: 남북관계와 북핵문제 20년’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회고록에 따르면 임 전 원장은 2002년 4월 평양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 2000년 제1차 남북 정상회담 합의 사항인 서울 답방 문제를 꺼냈다는 것.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사실 작년 봄에 서울을 방문하려고 했다. (중략) 그런데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 북한을 적대시하는 부시의 대통령 당선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서울은 부시의 대북 적대시정책을 수행하는, 미군이 있는 위험한 곳이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대신 제3국인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의 만남을 제의하며 “필요하다면 러시아 대통령과 3국 정상회담을 통해 시베리아 철도 연결 문제도 협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를 전해들은 김 대통령이 “서울이 아니면 판문점에서 만나자”는 대안을 제시했고 북한이 불응함으로써 답방이 무산됐다는 것.

또 회고록은 부시 행정부 내 네오콘(신보수주의자) 인사들이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계획(HEU) 의혹을 공식화하기 전 한국 정부에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의 중단을 요구했다고 했다.

임 전 원장은 남북이 2000년 정상회담 직후 정상 간 비상연락망인 ‘핫라인’을 개설해 남북관계의 고비 때마다 활용했다고 회고했다. 2002년 6월 서해에서 교전이 발생했을 때는 “이 사건은 순전히 아랫사람들끼리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고였음이 확인됐다. 유감이다”라는 긴급 통지문을 보내왔다는 것.

김일성 주석 부자와 나눈 재미있는 이야기도 공개했다. 김일성 주석은 1992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부지런함을 칭찬하면서 “김 회장의 부인은 남편을 볼 수가 없어 골프를 배워 남편을 치는 기분으로 골프공을 친다고 한다. 자본가들이 그렇게 열심히 하니까 남쪽의 기업들이 발전하는 것이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은 2002년 4월 “나는 인터넷을 통해 청와대, 국정원, 통일부 등의 사이트를 자주 들어간다”며 “통일부의 ‘북한 올바로 알기’ 사이트도 아주 좋은 착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공동경비구역(JSA)’ ‘여인천하’ ‘태조 왕건’ ‘명성황후’ 등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감상도 늘어놓았다고 회고록은 전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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