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李대통령 취임식장의 ‘외교 구멍’

  • 입력 2008년 3월 5일 02시 58분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외국 축하사절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유럽의 큰 나라에서 온 사절단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 독일 이탈리아에서 아무도 오지 않았다. 외국 정부대표 17명이 왔지만 유럽에선 국가정상은 고사하고 그럴듯한 고위 인사를 보낸 국가도 없었다. 유일하게 프랑스의 필리프 세갱 회계감사원장이 참석했으나 그는 사회당 소속의 전(前) 정부 사람으로 현(現) 사르코지 정부를 대표할 인물이 못 된다.

유럽 대표 빠져 글로벌외교 無色

전직 정상을 비롯한 특별참석인사 65명 가운데도 유럽에서 온 VIP는 보이지 않았다. 취임식 당일 오후부터 다음 날까지 청와대에서 계속된 이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과 접견에도 유럽 측 인사는 한 사람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새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글로벌 외교’를 주창했다.

유럽도 놀란 모양이다. 취임식 직후부터 서울 주재 유럽 외교관과 경제인들이 한국의 가장 큰 잔치에 유럽이 빠진 데 대해 불만을 표시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지난 주말에는 유럽 주요국의 한 대사에게서 ‘유럽 부재(不在)’에 대한 소회를 들을 수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조건이기는 했지만 자칫 유감 표시로 비칠 수도 있는 면담을 흔쾌히 수락한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한국 정부의 초청장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유럽국들이 축하사절을 보내는 것은 관례가 아니다”라고 유럽 대표가 취임식에 보이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축하할 마음이 있어도 한국이 초청을 안 했으니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새 정부가 유럽 어느 나라의 누구를 초청해야 하는지, 특히 회원이 27개국이나 되는 유럽연합(EU)의 경우 어디로 초청장을 보내야 하는지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국도 EU도 상대를 잘 모른다는 게 드러났다”면서 “상호 이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럽이 어떤 상대인가. EU는 세계 최대 시장이자 우리에게도 중국에 이어 제2의 수출무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가운데 2개국(영국 프랑스), 그리고 G8의 절반(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이 유럽 국가다.

새 정부는 ‘역대 가장 많은 외국 정상이 참석했다’는 자화자찬으로 취임식을 포장했지만 그 못지않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새 정부 외교의 출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취임식에 유럽을 제외한 건 큰 실수다. 숟가락 하나 더 놓는 쉬운 일을 하지 못했다.

분위기상으로는 새 정부 출범 이후 한국 외교의 앞길이 갑자기 훤해진 듯하다. 특히 미국과 일본이 새 정부의 관계 개선 움직임에 손을 마주 치며 호응하고 있다. 그러나 외교무대는 냉정하다. 잔치 분위기는 곧 가시게 된다. 국익을 챙기는 실전(實戰)에 돌입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한일 셔틀외교만 해도 아직은 걸음마 단계다. 셔틀외교에 돌입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자신들의 약속을 재임 도중 파기한 기억이 생생하지 않은가.

중국도 ‘상대적 경시’에 불만

셔틀외교의 모델은 독일과 프랑스다. 양국은 1963년 샤를 드골과 콘라트 아데나워가 서명한 엘리제조약으로 셔틀외교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조약에 따라 양국 정상은 1년에 최소 두 차례 만나 양국 현안을 논의한다. 외교 국방 교육부 장관은 3개월마다 만난다.

중국 최고의 외교관이라는 평을 듣던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중국 총리는 “외교에는 사소한 일이 없다”고 했다.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몰입하느라, 중시해야 할 다른 나라를 소홀히 하는 것은 글로벌 외교가 되풀이해서는 안 될 ‘사소하지 않은 실수’다. 유럽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상대적 경시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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