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 차관보 전격 방북…美 추가 선물 공세로 ‘北 비핵화’ 재촉

  • 입력 2007년 6월 22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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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21일 북한을 전격 방문한 목적은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중단하거나 늦추지 못하게 하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힐 차관보는 이날 북한 측에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및 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료 조치의 조기 이행,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가속화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조치는 그동안 북한이 비핵화의 필수 조건으로 요구해 온 것이다. 힐 차관보가 이번에 북한에서 풀어 놓은 ‘선물보따리’에는 비중이 있는 제안이 많이 있어 북한 측도 만족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힐의 방북 자체가 선물=북한은 지난해 6월 1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미국이 당사자인 우리와 마주 앉으려 하지 않는다”며 힐 차관보의 방북을 공식 초청했다.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이 핵 개발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북한은 북핵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인 힐 차관보가 방북해야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 철폐 의사를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이번 방북은 북한의 숙원을 풀어 주는 측면이 있다. 특히 힐 차관보는 북한의 핵 시설 폐쇄 조치 이행 후 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방북하려던 당초 방침을 바꿔 북한이 폐쇄 조치를 착수하기도 전에 방북을 단행했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미국의 정치적 인정을 받기 위해 애를 태워 온 북한에 정치적 선물을 줬다’는 평가도 나왔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인 조선신보가 21일 ‘북한은 미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적대 정책의 전환 의지를 확인했다’고 전한 데서도 북한의 고무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미국의 구상=힐 차관보의 이번 방북은 미국이 적극적으로 추진해 성사된 것으로 전해졌다. 형식은 6자회담 북한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의 초청이지만 실제로는 미국이 국무부와 뉴욕의 주유엔 북한대표부 간의 채널을 통해 힐 차관보의 방북 의사를 먼저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는 부시 대통령이 1년 8개월 남은 임기 내에 북핵 문제를 풀어 외교적 성과를 올리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은 북한의 핵 시설 폐쇄 조치가 이행되지 않았는데도 그 다음 단계인 핵 시설 불능화를 연말까지 마무리 짓고 마지막 단계인 핵과 관련 시설의 폐기를 내년 안에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잡고 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대사는 지난달 한 포럼에서 “올해 말 또는 내년 초엔 북한의 핵 시설 해체 단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6자회담, 2·13합의를 이끌어 냈던 힐 차관보-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안보보좌관-부시 대통령 간에 북핵 문제에 관한 직보 체계가 가동되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다른 소식통은 “부통령실과 국방부 등 강경 기조를 유지해 온 대북정책 관련 기관이 정책조율 과정에서 배제된 것 같다”고 말했다.

▽힐의 방북 보따리=미국은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에 묶였던 북한 자금의 송금 문제가 해결됐지만 북한이 “아직 국제 금융체제로의 복귀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비핵화 조치를 중단할까 봐 우려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은 그동안 북한이 비핵화 조치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던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위한 조치의 가속화 등을 통해 북한을 달래는 전술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힐 차관보는 미국이 대북 적대 정책을 폐기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북한 측에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포럼도 조기에 구성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힐 차관보가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미국의 대북 고농축우라늄(HEU) 핵 프로그램 장비의 구입 방안까지 실제로 북한 측에 전달했다면 북한의 비핵화를 촉진하기 위한 미국의 계획이 상당히 구체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반응=일단 핵 시설 폐쇄 등 비핵화 조치에 속도를 내는 모습을 보이겠지만 길게 지켜봐야 한다는 분석이 많다.

북한이 힐 차관보의 방북을 임기 막바지에 처한 부시 행정부의 ‘약한 모습’으로 간주하고 특유의 ‘떼쓰기’ 외교로 시간을 끌면서 비핵화에 대한 보상을 늘리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 김정일, 힐 차관보 만날까

21일 방북한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날까.

정부 당국자는 이날 힐 차관보의 방북 직후 “현재까지 김 위원장 면담은 잡혀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북-미관계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도 “북한이 김 위원장과 미국 당국자의 면담이라는 ‘중요한 카드’를 쉽게 쓸 것 같지 않다”고 전망했다.

김 위원장은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방북이 성사될 경우 라이스 장관과 면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2000년 10월 방북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은 김 위원장과 2차례 회담을 했다.

반면 2002년 10월 방북했던 제임스 켈리 당시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김 위원장을 만나지 못했다. 켈리 전 차관보가 주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북핵 문제를 논의했던 점에 비춰 볼 때 힐 차관보도 강 부상과 핵문제를 협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힐 차관보가 김 위원장에게 전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메시지를 갖고 방북했다면 김 위원장을 만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힐 차관보는 켈리 전 차관보의 방북 이후 평양에 간 미 정부 관계자 중 가장 고위직이다. 정부 당국자는 “힐 차관보가 부시 대통령의 특사는 아니지만 그의 방북에 대한 미국 최고위층의 재가가 있었을 것”이라며 여운을 남겼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 어떻게 성사됐나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의 방북 계획은 지난 주말을 고비로 급진전됐다.

미국은 지난주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에 묶여 있던 북한 자금의 송금 문제가 풀리는 시점을 전후해 뉴욕의 외교 채널을 통해 북한 측에 힐 차관보의 방북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의 반응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힐 차관보는 북한이 16일(지난주 토요일) 핵 시설 폐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전 조사단을 초청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해 방북 계획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당시 아시아소사이어티 주최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몽골에 체류 중이던 힐 차관보는 휴대전화와 e메일을 활용해 북한 측과 직접 방북 계획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힐 차관보는 중국과 한국을 연쇄 방문한 18일 북한 측에서 ‘21일 방북하는 게 어떠냐’는 메시지를 전달받고 한국과 중국 정부의 북핵 담당 당국자들과 극비리에 방북 문제를 상의했다. 그는 19일 오전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방북 구상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송 장관은 이날 오후 통화를 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에게서 미국 정부가 힐 차관보의 방북을 최종 재가했다는 방침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힐 차관보의 방북 계획은 철저히 함구에 붙여졌다. 한국 정부 내에선 21일 오전까지도 소수의 핵심 고위 당국자 외에는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한국을 떠나 일본을 방문했던 힐 차관보는 21일 오전 9시경 도쿄(東京) 인근의 미군 비행장에서 군용기를 타고 경기 평택시 오산미군기지로 향했다. 이때까지도 그의 방북 계획은 한국 미국 일본 어디에서도 공개되지 않았다.

언론에 처음 알려진 시점은 이날 오전 11시경 그를 태운 군용기가 평양으로 가기 위해 오산기지를 떠나기 직전이었다. 오전 11시 22분 이륙한 군용기는 낮 12시 35분경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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