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수 前검찰총장 ‘폐지 압력’ 발언 이후 주목받는 대검 중수부

  • 입력 2007년 4월 24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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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2002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2004년 초. 당시 송광수 검찰총장, 김종빈 대검찰청 차장, 안대희 중수부장, 문효남 수사기획관 등은 노무현 대통령 조사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일부 참석자는 “어떤 형식으로든 노 대통령 조사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으나, 송 총장은 “현직 대통령은 임기 중에 형사소추가 불가능하다”며 조사에 반대했다. 그해 5월 당시 안 중수부장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노 대통령이 한때 운영했던 생수회사 장수천의 빚 변제 자금에 대해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지만 대통령은 헌법에 형사상 특권을 갖고 있고 대통령 직무수행의 안정성이 요청돼 법률상 입건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그 직후 여권 내에서는 대검 중수부 폐지론이 대두됐다. 송 전 총장이 최근 대학 강의 도중 이를 거론하면서 ‘대검 중수부’가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굴곡 많은 대검 중수부=전두환 정권 때인 1981년 출범한 대검 중수부는 검찰 내 최고 사정(司正) 수사부서로 불린다.

박정희 정권 시절 그 전신이었던 대검 수사국이나 특별수사부는 주로 대형 금융사건을 맡아 처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권부의 하명을 받아 고위 공직자나 정치권 인사들을 내사하는 게 주 임무였다.

1982년 6월 이철희 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을 처리하면서 대검 중수부는 비로소 세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영삼(YS) 정부 출범 초기 대대적인 사정 수사를 주도하면서 거악을 척결하는 기관으로서 자리를 잡아 갔다.

그러나 대형 수사를 하다 보면 ‘살아 있는 권력’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고, 늘 풍파를 겪어야 했다. 또한 정권이 바뀐 뒤에야 전(前)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YS 정부 출범 첫해인 1993년 대검 중수부는 ‘금융계의 황제’ 이원조 씨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당시 여권 대선자금의 꼬리를 잡았으나 수사가 더 진척되진 못했다. YS 정부 마지막 해인 1997년 한보사건 때에도 대검 중수부는 YS의 차남 김현철 씨 수사를 미적거리다가 당시 최병국 중수부장이 2개월여 만에 교체되는 파동을 겪어야 했다.

이런 풍파가 지난 뒤에는 어김없이 대검 중수부 폐지론이 거론됐다. 중수부 폐지론이 처음 대두된 것도 1997년 가을이었다.

김대중(DJ)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대검 중수부는 2001년 ‘이용호 게이트’를 수사하면서 검찰 최고위 간부의 인척이 연루된 사실을 놓치는 바람에 논란에 휩싸였다. 대검 중수부의 수사가 끝난 뒤 이어진 특별검사팀의 수사에서 이 같은 사실이 새로 밝혀지면서 살아 있는 권력에 약한 모습을 드러냈다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대검 중수부 폐지 문제가 구체적으로 제기된 것은 1999년이었다. 시민단체의 주장에 밀려 당시 법무부는 대검 중수부를 폐지하는 대신 검찰총장 직속의 공직자비리수사처를 만들어 사정 수사를 맡도록 한다는 절충안을 내놨다.

2004년 6월 대검 중수부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끝난 직후에도 검찰과 청와대, 강금실 당시 법무부 장관 간에는 대검 중수부 존폐를 둘러싸고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당시 송 총장은 “중수부 수사가 욕을 먹는다면 내가 먼저 내 목을 치겠다”고 반발했고,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 석상에서 “국가기강 문란 행위”라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중수부장은 ‘이카로스’?=검찰 내 요직 중의 요직으로 꼽히는 대검 중수부장을 거친 인사는 대부분 ‘출세가도’를 달렸다.

현재 검찰에 재직하는 인사를 제외한 역대 중수부장 출신 23명 중 초대 중수부장인 이종남 씨를 비롯해 김두희 박종철 김태정 박순용 이명재 김종빈 씨 등 7명이 검찰총장 자리에 올랐다. 이 중 이종남 김두희 김태정 씨 등 3명은 법무부 장관까지 지냈다.

이종남 씨와 신건 씨는 검찰을 떠난 이후 각각 감사원장과 국가정보원장을 지냈고, 이원성 최병국 씨는 국회의원으로 변신하는 등 정부 및 정치권의 고위직으로 나간 경우도 적지 않다. 한영석 송종의 씨는 법제처장을 지냈고, 안대희 씨는 현재 대법관으로 재임하고 있다.

하지만 대검 중수부장 자리는 자칫 정치권의 논란에 휩싸이거나, 여론의 비판을 받아 낙마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대검 중수부장 자리는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다가 땅으로 추락했다는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에 비유되기도 한다.

DJ 정부 시절 ‘이용호 게이트’ 수사 사령탑을 맡았던 유창종 씨는 특별검사팀이 성과를 올리면서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9개월 뒤 서울지검장으로 복귀했다.

신광옥 씨는 DJ 정부에서 중수부장을 지내다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됐으나 나중에 ‘진승현 게이트’ 사건 수사 때 구속되기도 했다. 법원은 신 씨가 진 씨 측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정성진 씨는 YS 정부 출범 당시 재산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1개월도 채우지 못한 채 스스로 물러났으나 현 정부에선 국가청렴위원장(장관급)으로 기용돼 명예를 회복했다.

▽중수부의 현주소=한때 대검 중수부 산하에는 정보수집 기능을 맡은 4과를 포함해 1∼4과까지 4개 과가 있었다.

그러나 2004년 중수부 폐지 논란이 있은 뒤 조직이 일부 축소돼 지금은 1, 2과만 남아 있다. 첨단범죄수사과가 중수부 산하에 배속됐지만 범죄정보 수집기능은 검찰총장 직속의 범죄정보기획관실로 분리돼 있다.

또한 2004년 이후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 외에는 직접 수사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웬만한 사건은 가급적 일선 지검 특수부로 넘기고 수사를 지도하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물론 지난해에 현대·기아자동차그룹 비자금 사건, 론스타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맡았지만 권력형 비리 사건은 아니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장택동 기자 will7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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