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창혁]온중유진(穩中有進)

  • 입력 2007년 2월 2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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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8일 토요일. 오전 7시도 되지 않았는데 중국 베이징(北京) 중난하이(中南海)에 있는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들의 비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1시간 전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군이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대사관에 폭격을 가했다는 급보였다. 긴급 소집된 정치국 회의의 분위기는 무겁고 침통했다. 장쩌민 국가주석은 “중국으로 하여금 동란에 빠져들게 하고 전쟁의 무거운 보따리를 짊어지게 하려는 도발”이라고 규정했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중-미 간 최대 위기였다.

▷미국은 서둘러 ‘오폭(誤爆)’이었다고 해명했지만 중국 전역은 반미(反美) 구호로 들끓었다. 베이징대에는 ‘중앙 영도자들은 모두 죽었는가’ ‘청나라 정부보다 못하다’라는 대자보가 나붙었고, 공산당 원로들까지 나서 “노인(마오쩌둥)이 있을 때 미국이 감히 이랬는가?”라며 당 지도부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다음 날 저녁 TV에 등장한 후진타오 부주석은 미국을 규탄하면서도 인민들에게 ‘안정’을 호소했다. 중국은 당시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목을 매고 있었고, 이는 미국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중국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1972년 2월 21일) 35주년을 계기로 양국 관계를 집중 재조명하고 있다. 관영 신화통신이 발행하는 시사주간지는 현재의 중-미 관계를 ‘평온할 온(穩)’ 한 글자로 정리했다. 평온하면서도 듬직한 가운데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뜻의 ‘온중유진(穩中有進)’이라고도 했다. 중국 지도부의 실용적 용미(用美)주의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중국은 요즘 일본과도 밀월 관계를 쌓아 가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작년 9월 취임 이후 첫 방문국으로 중국을 찾자 ‘파빙지려(破氷之旅·얼음을 깨는 여행)’라고 대환영했다. 닉슨 방중 때 썼던 표현이다. 미국과 일본의 밀월은 말할 것도 없다. 엊그제 발표된 ‘아미티지 보고서’의 제목도 ‘미일 동맹: 2020 아시아 정책’이었다. 그럼 한국은 누구와 밀월 관계인가.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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