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 칼럼]국민에 대한 모욕

  • 입력 2007년 2월 2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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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 참 재주 좋아요. 단 두 사람이 정당 다섯 개를 만드니 말이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자 외국인 친구는 덧붙였다. “처음엔 각각 정당 하나씩을 만들지요. 다음엔 합당을 해서 새 정당을 만들어요. 얼마 안 가 다시 갈라서서 새 정당을 만들지요. 그러니 모두 다섯 개가 되지 않소?” 광복 직후 우리가 ‘조선 사람’이던 시절에 떠돌던 우스갯소리다. 크고 작은 정당이 50여 개에 이르고 이합집산이 심하니 누군가가 지어낸 얘기일 것이다.

일부 여당 의원이 집단 탈당하는 괴이한 사태를 보고 전생의 기억처럼 아득한 어린 시절에 접한 우스개가 생각났다.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고 농민이 대종을 이루던 사회는 무려 1만2400개의 직업을 갖춘 사회로 분화하고 발전했다. 사나운 교육열로 세계적 명성을 누리며 인구 대비 대학생 비율이 세계 1위이다.

정치 분야에서는 고색창연한 구태가 되풀이된다. 고난과 회한으로 가득 찬 역사적 체험과 곡절 많은 선거를 통해 정치교육도 받을 만큼 받은 터이다. 그런데 선거 때마다 새 정당 만들기 장기자랑으로 국민을 헷갈리게 하는 변괴가 끊이지 않는다. 100년 가는 정당을 만든다며 점령군 탱크부대처럼 기세등등하게 새살림을 차린 일이 10년도 아니고 불과 3년 전이다.

두 사람이 정당 다섯 개 만든다?

정당의 궁극적 목표는 정권 획득이고 이를 위한 효율적 수단을 찾는 것은 정치인의 자유에 귀속된 그들의 소관 사항이다. 문제는 탈당 동기와 표방하는 명분에 있다. 현재의 지지율을 갖고는 승산이 없으니 새 정당의 새 브랜드로 승리를 도모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걸림돌이 되는 호주와의 관계를 청산하자는 것이다.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건 그들의 속셈은 그렇게 요약되고 또 스스로 실토한 바 있다. 어느 곳에서나 정치 행태는 몰(沒)도덕적 빈축의 사례가 될지언정 도덕적 모범 사례가 되는 일은 드물다. 따라서 여기서 거론하는 것은 그들 내부의 정치윤리가 아니다. 표방 명분 속에 내재해 있는 냉소적 함의가 문제이다.

이제 대선은 10개월이 채 남지 않았다. 정당 지지율은 10%대에 머물러 있다. 이럴 경우 야당 생활을 하며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 제2의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 순리요, 정치인의 바른 자세다. 여야가 친선 경기 하듯 정권을 주고받는 현상이 정당정치의 이상이다. 그런데 어떻게든 승리해야겠다는 것이다. 짤막한 기간에 가시적 업적을 내어 지지율을 역전시킬 공산은 희박하다. 나머지 선택지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많은 사람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첫째, 비장의 한탕주의로 깜짝쇼를 연출해서 국민의 넋을 빼놓는다. 너무 일러도 안 되고 더디어서도 안 된다. 구원투수 후보가 동서남북 어느 쪽에 있느냐는 자명하다. 둘째, 흘러간 시절의 만병통치 약장수처럼 번지르르한 공약을 늘어놓아 또다시 국민을 현혹한다. 지역이기주의에 호소함도 곁들인다. 지난 선거에서 7% 경제성장률이 노무현 후보의 공약 중의 하나였음을 국민은 잊어버렸을 것이다. 셋째, 가차 없는 음해성 전략의 구사이다. 대수롭지 않은 추문이라도 침소봉대해서 반복적 누적적으로 유포하면 효과는 만점이다. 더구나 막강한 시청각 매체를 우군으로 갖고 있지 않은가? 야당의 분열이나 경선 불복도 기대해 볼 만하지 않은가?

이것이 탈당파의 속셈이요, 표방하는 명분 속에 내재한 구체적 함의일 것이다. 국민을 대중 조작(操作)의 만만한 대상으로 얕잡아보는 국민관이다. 예의를 모르는 냉소적이고 불손하고 턱없이 모욕적인 국민관이다. 야당의 최근 동태도 이들의 희망을 격려 고무해 주는 듯한 감이 없지 않다.

세 번 속을 땐 속은 자가 더 나빠

문제는 국민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인간 수명이 햇수가 아니라 호흡수로 정해져 있다면서 냉정을 권장하는 어느 문화권의 속담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첫 번째 속았을 때는 속인 자가 나쁘고, 두 번째 속았을 때는 피장파장이다. 세 번째 속았을 때는 속은 자가 더 나쁘다는 것이다. 착한 것과 못난 것은 생판 다르며, 세상에 악덕이 번창하는 이유는 바로 못난이 때문이라고 그 지혜는 가르친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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