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 前대통령-박정희 前대통령 관계는…

  • 입력 2006년 10월 23일 02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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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8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바로 이틀 전 소집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최규하 대통령은 갑자기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대전 대덕으로 향했다.

대덕의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국방과학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 말기에 한미 간 갈등의 불씨가 됐던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의 산실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끌던 국군보안사령부가 국방과학연구소 측에 핵무기 개발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최 전 대통령은 신군부의 갑작스러운 요구로 혼란에 빠져 있던 연구원들을 진정시켰다. 박 전 대통령이 은밀하게 추진해 오던 핵무기 프로그램은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하지만 최 전 대통령의 이런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며칠 뒤 12·12쿠데타 성공 이후 보안사는 국방과학연구소에 있던 핵무기 관련 자료와 장비를 모두 가져가 폐기하고 말았다.

당시 신군부가 맨 먼저 핵무기 개발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은 미국으로부터 정권의 정통성을 승인 받기 위한 하나의 조치였다는 게 최 전 대통령 측의 설명이다. 나중에 최 전 대통령은 측근 인사들에게 “12월 8일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그날 전두환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토로했다.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당시 핵무기 개발을 계속할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현직 대통령인 자신뿐이었으나 현실은 달랐던 것.

최 전 대통령은 나중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박정희 사람이다”라고 말해 왔다고 한다. 이는 간접적으로 전 전 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에 반대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핵무기 개발과 관련한 일화에서 보듯, 그는 박 전 대통령이 남긴 유산을 계승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최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후 격동기의 상황에 대해 일체의 증언을 거부했지만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일종의 비망록이라고 할 수 있는 메모와 자료를 다수 남겨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에서 회고록을 쓰라는 권유가 많았지만 최 전 대통령은 “회고록은 나를 정당화하게 된다. 대신 비망록을 남겨 놓을 테니 이를 내가 죽은 뒤 적절한 시점에 공개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정훈 기자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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