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학계 “국민이 위임한 권한… 국민 뜻 반해선 안돼”

  • 입력 2006년 8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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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27일 해리엇 마이어스 미국 대법관 내정자(앞)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대법관 후보에 지명된 직후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을 만났을 때의 모습. 그는 보수 진보 양 진영으로부터 적임자가 아니라는 반발을 산 끝에 지명 24일 만에 내정자 자격을 자진 철회하는 형식으로 물러났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지난해 10월 27일 해리엇 마이어스 미국 대법관 내정자(앞)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대법관 후보에 지명된 직후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을 만났을 때의 모습. 그는 보수 진보 양 진영으로부터 적임자가 아니라는 반발을 산 끝에 지명 24일 만에 내정자 자격을 자진 철회하는 형식으로 물러났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청와대가 연일 대통령의 인사권은 고유 권한이므로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대통령 인사권의 범위와 한계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이병완 대통령비서실장은 김병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정치권과 여론의 비판에 밀려 사의를 밝힌 것과 관련해 3일 “대통령의 인사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으로 최대한 존중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남춘 대통령인사수석비서관은 4일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글에서 “인사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이 인사권에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야 의원들과 학자들은 대통령의 인사권은 국민이 위임한 것으로 국회와 여론의 건전한 견제를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행사돼야 한다며 청와대의 ‘대통령 고유 인사권’ 주장을 비판했다.

대통령의 인사권은 헌법 78조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공무원을 임면한다’에 근거하고 있다.

▽“대통령 인사권은 ‘절대권’ 아니다”=법조인과 학자들은 대체로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인사권이 대통령 마음대로 인사를 하라는 뜻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나타냈다.

이석연 변호사는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권한이나 지위는 국민이 총의를 모아 대통령에게 위임한 것”이라며 “대통령의 인사권은 형식적인 것이며 국민의 뜻과 여론을 모아 합당하게 행사해야 헌법적 정당성을 가진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 2항은 대통령이 국민에게 위임 받은 권한을 국민의 뜻과 다르게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라는 것.

임지봉 건국대 법대 교수는 “여론 등 민주적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대통령의 권한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나 언론 등이 대통령의 인사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민주적 통제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3일 CBS 라디오에 나와 “고위직 공무원은 워낙 중요한 자리라 국회가 청문회를 하고 시민단체나 언론의 개입이 있는 것”이라며 “대통령의 임명 권한은 언론이나 시민단체의 견제를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주의에는 다양한 플레이어가 있고 그것이 중요하다”며 “여러 이해단체나 관련 기관에 검토받는 것이 좋은 사람을 임명하는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대통령 인사권도 견제 받아야”=2005년 7월 인사청문회법이 개정돼 모든 국무위원이 인사청문회를 거치게 됐다. 이는 ‘대통령 인사권에 대한 국회와 여론의 통제’를 인정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허영 명지대 법학과 초빙교수는 “국무위원에 대한 인사권은 청문회를 거치는, 통제받는 인사권”이라며 “인사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니까 관여하지 말라는 것은 헌법이나 법률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말”이라고 말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대통령의 인사권은 삼권분립의 취지에 따라 견제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지적이 있다.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대통령제하에서 삼권분립은 견제를 통한 공동책임의 정신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고위직 인사는 대통령뿐 아니라 국회도 책임이 있다”며 “권력의 분산을 유도하는 것이 민주화라면 인사권 역시 예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대통령은 인사 문제에 있어서 홀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나, 인사권은 침해할 수 없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독단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덧붙였다.

소수이지만 대통령의 인사권은 대통령제의 아주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이기 때문에 최대한 존중돼야 한다는 견해를 밝힌 전문가도 있었다.

신우철 중앙대 법대 교수는 4일 “대통령제에서 국무위원 인사권에 대해 의회가 견제를 할 수는 있지만, 인사권은 원칙적으로 대통령에게 있다. 이게 대통령제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다. 따라서 이번 사태(김병준 교육부총리 임명 논란)가 정치적 논란이 될 수는 있겠지만 헌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헌법재판소 재판연구관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인사 등 대통령의 결정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지는 것이기 때문에 헌법상 대통령의 인사권이 보장된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헌법 정신을 생각할 때 대통령은 국민의 뜻에 귀 기울여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정치권과 청와대 간 논란 계속=여당인 열린우리당의 문병호 제1정책조정위원장은 이날 평화방송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 고유의 인사권이라는 건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대의 이야기”라며 “인사권이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인사권은 대통령 맘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국민이 위임한 권리이므로 국민 뜻을 헤아려야 한다”며 이같이 비판했다.

한나라당 장윤석 인권위원장은 “인사권이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청와대의 주장은 잘못된 헌법 인식의 발로이며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리를 망각한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박남춘 수석은 “대통령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대통령 인사권에 대한 침해이며 국정 수행에 필요한 대통령의 마지막 권한마저 무력화하는 것”이라며 “이런 식의 인사권 흔들기는 일부 언론과 야당의 정치 전략이며 여당까지 그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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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박성원 기자 swpark@donga.com

▼선진국에선…▼

부시 지명 대법관, 보수진영 반발에 사퇴
日선 여론에 밀려 장관 12일만에 물러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자신의 법률고문을 지냈던 해리엇 마이어스 씨를 샌드라 데이 오코너 연방대법관 후임으로 지명했다. 텍사스 주지사 시절부터 가까이해 온 부시 대통령의 측근이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우군(友軍)’이라고 할 수 있는 보수진영이 들고 일어났다. 판사 경력이 전혀 없는 데다 낙태 문제 등에 대해 입장이 불분명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여론이 들끓자 마이어스 씨는 지명된 지 한 달이 채 못 돼 자진 사퇴 형식으로 상원 인준을 포기했다.

존 볼턴 유엔 주재 미국대사의 임명과정은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과 민심의 충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대북 강경파이자 네오콘(신보수주의세력) 핵심인사로 분류되는 볼턴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을 유엔대사에 지명했으나 야당인 민주당은 물론 집권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들까지 ‘부적절한 인사’라며 반발했다. 상원 청문회 인준절차가 난항을 거듭하자 부시 대통령은 상원 휴회 기간을 틈타 임명을 강행했다. 상원 인준이 아니라 ‘휴회 중 임명’이라는 헌법상 권한을 휘두른 것이다.

민주당과 여론은 백악관의 권력남용과 비밀주의를 규탄했고, 볼턴 대사는 지금까지도 그런 비난의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다. 상원은 지금 다시 볼턴 대사 인준청문회를 벌이고 있다.

자민당 내 파벌끼리 상의해 국회의원 중에서 장관을 임명하는 일본의 경우 미국의 청문회와 같은 인사 검증장치는 없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장관을 임명했다가 여론의 반발로 철회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1997년 9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당시 총리는 사토 다카유키(佐藤孝行) 자민당 의원을 총무청 장관으로 임명했다. 문제는 이 사토 의원이 1970년대 일본 정계를 뒤흔든 ‘록히드사건’에 연루돼 유죄판결을 받고 집행유예기간을 거쳐 복당한 인물이라는 점.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와 절친한 사이이기도 했던 사토 의원은 당내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하시모토 총리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도 좋은 일 아니냐”며 국민의 이해를 구했지만 여론은 들끓어 올랐다. 결국 사토 의원은 12일 만에 사임했고 하시모토 총리는 대국민사과를 발표했다.

이 사건은 1996년 1월 출범한 하시모토 정권이 내리막길을 걷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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