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속에서 18년째 잠자는 서머타임

  • 입력 2006년 6월 14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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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새벽에 일어나는 고교 3학년 아이가 더 일찍 일어나야 한단 말입니까.”

1997년 일광절약시간(서머타임)제를 추진했던 통상산업부(현 산업자원부) 공무원들은 이런 전화에 시달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버지 제사를 언제 지내야 하느냐” “자녀의 출생시간이 헷갈린다” “역사 기록에 오류가 있다” 등 민원의 내용도 다양했다.

당시 에너지관리과에 근무했던 A 팀장은 “원래 반대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큰 법”이라며 “1988년 올림픽이 끝난 뒤 서머타임제가 폐지된 이유 중 하나는 이 제도가 올림픽 경기를 외국의 방송 시간에 맞추기 위한 것 아니었느냐는 반감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고유가 행진이 계속되고 있지만 에너지 절약을 위한 대표적 제도의 하나인 서머타임제는 1989년 이후 실시되지 않고 있다. 산자부는 1997년 서머타임제도를 다시 검토했다가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 퇴근 후 여가활동 활성화

외국은 어떨까.

2005년 3월 기준으로 세계 86개국에서 서머타임제를 실시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중 이 제도를 실시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아이슬란드 3개국뿐이다. 아이슬란드는 백야현상이 있어 이 제도가 필요 없는 나라다.

서머타임제는 초창기에는 주로 에너지 절약을 위해 도입됐지만 이제 선진국에서는 퇴근 후 여가활동과 가족생활을 활성화하는 제도로 인식되고 있다.

오후 9∼10시에도 해가 떠 있어 퇴근 후 자기 계발이나 가족과의 여가를 갖기에 좋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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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되살리려다 무산

한국에서도 1948년부터 약 10년 동안 서머타임제가 실시됐다.

서울 올림픽을 전후한 1987년과 1988년에도 실시한 적이 있다.

산자부는 1997년 다시 도입하려고 했지만 다른 부처들의 반대로 결국 무산됐다. 여론이 좋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1995년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73%가 서머타임제 시행을 찬성했다.

2005년 한나라당 이규택 의원 등은 서머타임제를 되살리는 내용의 ‘표준시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한국의 표준자오선이 동해 쪽에 위치해 이미 약 30분 일광시간이 절약되는 셈이어서 입법의 필요성이 없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이 법안은 아직 상임위원회에 계류 중이지만 이 의원 측은 13일 “개정안을 더는 추진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 전력 0.275% 절감 효과

에너지경제연구원의 1997년 연구에 따르면 서머타임제를 5∼9월 실시하면 전체 전력소비량의 0.275%를 절약할 수 있다. 주로 가정용 조명과 사무실 냉방 전력이 절약된다. 이에 따른 에너지비용 절감액은 5000만 달러(약 475억 원)다. 9년 전 수치지만 적지 않은 금액이다.

서머타임제 반대론의 가장 큰 이유는 근무시간이 연장될 가능성이다. 해가 떠 있는 ‘대낮’에 퇴근을 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시 퇴근이 정착돼 가는 상황에서 서머타임제가 실시되면 퇴근 후 외식이나 쇼핑, 스포츠 시설 이용 등으로 내수 경기가 활성화되리라는 전망도 있다.

미국에서는 서머타임제 실시로 야간 범죄와 교통사고가 줄어들었다는 통계가 있다.

○ 공무원들이 게을러서?

산자부 관계자는 “서머타임제를 실시하려면 지금부터 2년을 꼬박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1년에 두 번 시곗바늘 조정, 국제선 비행기 시간 변경 등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

전문가들은 “이 제도를 실시하면 초기 행정비용은 많이 들지만 일단 정착되면 경제적 심리적 이익이 많다”고 한다.

서울대 정홍익 행정대학원 교수는 “서머타임제가 실시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공무원들의 게으름 때문”이라며 “에너지 절약과 여가 활용을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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