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영 경찰청장 사표]與 “민노 등돌릴라” 사퇴종용

  • 입력 2005년 12월 30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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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사 떠나는 許청장허준영 경찰청장(가운데)이 29일 사퇴 의사를 밝힌 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사를 나서고 있다. 허 청장은 전용차에 타기 직전 “시위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이번과 같은 사태가 다시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경찰청사 떠나는 許청장
허준영 경찰청장(가운데)이 29일 사퇴 의사를 밝힌 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사를 나서고 있다. 허 청장은 전용차에 타기 직전 “시위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이번과 같은 사태가 다시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허준영(許准榮) 경찰청장은 29일 새벽에 직접 사퇴서를 작성했다. 이날 오전 출근 때 “잠을 잘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허 청장의 사표 제출엔 본인의 의지보다는 청와대와 정치권의 전방위 압박이 더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퇴 배경=허 청장은 28일 저녁까지만 해도 “절대 사퇴하지 않겠다”며 물러서지 않을 태세였다. 하지만 주변 상황은 허 청장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에 이어 열린우리당에서도 28일 오전부터 허 청장의 사퇴 불가피론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민주노동당의 ‘선(先) 청장 사퇴, 후(後) 협상’ 압박 전술도 여권에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열린우리당이 연말까지 새해 예산안을 처리하기 위해선 민주노동당과 민주당 등 ‘군소야당’의 협조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문희상(文喜相) 의원 등 일부 중진이 직접 나선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일부 의원들은 허 청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당 분위기와 국회 사정을 얘기하며 결단을 종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허 청장과 두 차례 통화한 한 중진 의원은 “허 청장이 처음에는 ‘농민들이 쇠파이프까지 휘두르니까 정당방위를 하다가 그렇게 된 것 아니냐. 시위문화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나만 물러날 수 없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대통령에 부담을 주는 것 같아 고민이다’고 했다”고 전했다.

청와대 측은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허 청장은 청와대 고위관계자도 만나 자신의 거취 문제를 협의했다고 경찰 관계자들이 전했다.

허 청장이 검경수사권 협상을 이끌면서 호송 거부 문제 등으로 청와대와 마찰을 자주 빚은 것이 운신의 폭을 좁힌 계기가 됐다는 분석도 있다.

허 청장은 퇴임사에서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청장이 물러날 사안은 아니라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파장=허 청장이 이날 사퇴에서 ‘중도 퇴진’의 부당성을 강조한 것은 청와대에도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등) 여론조사에서 70% 내외의 지지를 보여 주신 국민과 경찰관 등에게 사랑을 보낸다” “새해에는 목소리 큰 사람이 국민의 고막을 찢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등 사퇴서 곳곳에는 허 청장의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묻어났다.

허 청장은 사표 제출 직후 한동안 집무실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고 경찰청 관계자는 전했다.

수사권 조정과 순경 출신 경찰관의 지위 향상, 시위문화 개선 등 경찰의 권익 보호에 강경한 목소리를 내 온 허 청장은 경찰 조직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다. 정부 여당은 어떤 식으로든 경찰 조직을 달래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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