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技막힌 기능 한국]실력보다 학력 우선 "오라는 곳 없어요"

  • 입력 2005년 10월 29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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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통닭을 배달하고 있는 인승호 씨. 인 씨는 2001년 제36회 캐나다 몬트리올 국제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취업을 하지 못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다니고 있다. 전영한 기자
26일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통닭을 배달하고 있는 인승호 씨. 인 씨는 2001년 제36회 캐나다 몬트리올 국제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취업을 하지 못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다니고 있다. 전영한 기자
《한국은 올해 5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제38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 3개를 따내는 데 그쳤다. 금메달 순위로 역대 최악인 6위. 격년제로 열리는 이 대회에서 1977년 이후 14차례 종합우승을 차지하고 최근 5연패를 하는 등 ‘기능·기술 코리아’의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정부는 뒤늦게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기능·기술인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기술 코리아’의 추락은 하루아침에 ‘운 나쁘게’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외면 받는 기능·기술인=1991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기능올림픽 금메달 수상자인 대구 경상공고 정호철 교사는 올해 기능올림픽에서 참담한 성적을 거두자 청와대에 탄원서를 보냈다.

“스포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월 100만 원씩 연금을 받는데도 기능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연금이 아니라 장려금조로 월 28만 원씩 연간 340만 원을 받고 있다. 그나마 관련 분야에 계속 종사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기능인이 없었으면 우리 산업이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는지 정부에 묻고 싶다.”

정 교사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몸담고 있는 고교는 7년 만에 8개 학급이 절반으로 줄었고 야간반은 폐지됐다”며 “기능올림픽에 출전한 학생이 포상금과 표창장을 받더라도 취업도 안 되는 상황에서 누구에게 기능·기술인의 길을 걸으라고 권유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기능올림픽 입상자에 대한 기능장려 적립금은 당초 500억 원 규모를 목표로 출발했으나 정부가 출연금을 중단해 현재 100억여 원만 남은 상태다. 이나마 곧 고갈될 전망이다.

기능자격 소지자를 우선 채용토록 한 기능장려법도 권고 규정에 그쳐 유명무실하다.

정부는 또 올해 초 기능대학 교수 채용 때 학력을 따지지 않고 명장과 기능장을 선발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실제 채용된 사례는 아직 한 건도 없다.

▽세계 1위도 소용없다=28일 본보가 입수한 2005년도 기능장려금 지급 현황에 따르면 역대 기능올림픽 수상자 4명 가운데 1명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기능을 접고 다른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첫 출전한 1967년 스페인 마드리드 기능올림픽 이후 올해까지 금메달 234명, 은메달 108명, 동메달 76명 등 총 418명의 메달리스트를 쏟아냈다.

하지만 이들 메달리스트 가운데 1년간 동일 분야에 종사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켜 올해 기능장려금 지급 대상자인 사람은 317명으로 전체의 75%에 그쳤다. 세계 최고의 기능을 갖추고도 학력과 사회적 편견의 벽에 부닥쳐 동일 업종에서마저 외면 받았기 때문이다.

1991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31회 기능올림픽대회 정밀기기제작 분야에서 금메달을 딴 박기창(34·경북 구미시) 씨는 대회 이후 줄곧 전공이 아닌 프레스금형 분야에 종사해 왔다. 전공을 살리려 했지만 직업훈련원 출신이라는 이유로 취업을 거절당했거나 턱없이 낮은 임금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

기능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가운데는 자동차 세일즈, 노래방 운영에 나서거나 심지어 꽃게잡이 배를 타는 경우까지 나오고 있다. ▽기능·기술 인력 양성체제 바꿔야=한국의 산업 발전 단계나 기업 수요와 무관하게 실적 위주로 이뤄지는 기능·기술 인력 양성 체계에 수술 칼을 들이대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정광선(26) 씨는 2001년 기능올림픽 한국대회 원형(쇳물을 부어 주조를 할 수 있는 목형 틀을 짜는 수작업) 분야에서 금메달을 땄다. 정 씨가 요즘 하는 일은 자신의 전공과 관계없는 건축 인테리어 작업이다. 정 씨는 “일본이나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원형에 대한 수요가 거의 없다”면서 “대회 메달만을 위한 훈련을 했던 셈”이라고 털어놓았다.

기능대회 수상자 모임인 한국기능선수회 김영상 부회장은 “어느 분야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해도 오라는 기업이 없는데 그 분야에 평생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기능대회 입상자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능인 교육기관도 산업 사회의 시장원리에 따라 필요로 하는 기능 기술인을 길러 배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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