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강규형]‘아프리카 친북論’은 흘러간 노래

  • 입력 2005년 10월 21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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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80여 개의 식민지가 독립을 이루었다. 이 신생국들 중 대다수가 과거 지배세력들로부터의 진정한 독립과 자립적인 발전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했으며 미소(美蘇) 냉전 시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 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바로 제3세계의 등장을 이끌었고, 이러한 노력은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가 주창한 ‘비동맹(非同盟) 중립주의’와 1955년의 제1차 반둥회의로 실체화됐다. 이렇게 제3세계의 협조와 단결을 부르짖은 비동맹 운동은 이집트의 가말 나세르,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등이 주도했고 북한의 김일성 주석도 이러한 운동에 가세해 나름대로의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미소 양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지키기가 힘들었고 실질적 양극체제(兩極體制·bi-polar system)에서 사실상 둘 중 하나에 경도된 노선을 택하는 나라가 많았다. 당시 소련은 제3세계에서의 민족주의의 힘을 간파하고 이를 전후 체제 경쟁에 적극 이용하려 했고 따라서 ‘비동맹’을 내걸면서도 소련 쪽에 치우친 국가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소련의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제3세계와의 선린(善隣)에 노력한 지도자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맹렬히 비동맹 외교에 매진하게 됐고, 대한민국은 상대적으로 이들 세계와는 소원한 관계였던 것 또한 사실이다. 1970년대 엘 하지 오마르 봉고 대통령이 이끄는 가봉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한국 정부가 사력을 다한 것도 외교 경쟁에서 뒤진 아프리카에서 뒤늦게나마 외교적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북한은 제3세계에서의 외교 우위를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국력을 넘어선 지원활동을 했었다. 제3세계 국가들과 공산 반군 세력에의 지원은 훗날 북한의 경제에 부담을 주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한 교수의 느닷없는 발언이 이러한 옛 시절 이야기를 일깨워 주고 있다. ‘김일성은 위대한 근대적 지도자다’라는 제목의 이 글은 “아프리카인에게 김일성은 자신들의 지도자만큼이나 존경스러운 먼 동양의 지도자” “아프리카인들은 한국보다 북한을 더 친숙하게 생각한다”고 밝히고 있고 주한 남아공 대사관은 여기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박하는 성명을 냈다.

그분의 주장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몰역사성(沒歷史性)이라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였었다’ ‘했었다’라고 언급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960, 70년대의 주장이 작금(昨今)에도 통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자기주장을 입증하는 합당한 증거를 보여 줘야 한다. 사실 1970년대 후반 이후 세상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변화를 겪었다. 그 후 아웅산 사건에 따른 북한의 고립, 북한의 극심한 경제 실패와 한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이 극명하게 보여준 차별성, 한국의 민주화, 88서울올림픽의 성공, 동유럽 공산권의 파산과 비동맹운동의 약화 등으로 제3세계에서 북한과 대한민국의 처지는 역전된 지 오래다. 좋은 예 중 하나가 독립정권 수립 이후 북한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지원을 받던 짐바브웨다. 짐바브웨는 1994년에 한국과 수교협정을 맺은 반면 북한대사관은 1998년 재정난 때문에 스스로 문을 닫았다. 짐바브웨에서 가장 큰 건물 중의 하나가 과거 북한의 지원으로 설립된 ‘주체사상연구소’라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도 북한은 소외되고 있다. 물론 이런 지역에서 북한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잔존할 수는 있다. 하지만 냉정히 살펴보면 이미 대다수가 북한이 결코 자신들의 역할 모델이 되지 못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 교수님 덕분에 남아공은 공식적으로 한국에 친근감을 표시한 셈이 됐다.

하지만 학문적 주장은 역사성(歷史性)과 적실성(適實性)을 지녀야 한다. 한 교수의 과감한 주장은 아마도 1980년대 초반까지의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고 논쟁의 가치가 있는 발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지금은 이미 21세기인 것을.

강규형 명지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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