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론 공론화 수순의 일환”=노 대통령은 이병완(李炳浣) 대통령비서실장이 취임식을 한 다음날인 지난달 27일, 박 대표와의 회담 추진을 지시했다.
이 실장은 1일 기자들과 만나 “취임인사 예방 일정을 얘기하던 중 대통령이 ‘박 대표를 예방하면 국정 전반에 걸쳐 기탄없이 의견을 나누고 싶다는 뜻을 전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제안은 충분히 예상됐던 일이다. 노 대통령이 그동안 “대연정의 파트너는 제1야당인 한나라당”이라고 밝혀 왔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연정론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를 거쳐 정치권 협상에 나선다는 내부적 수순에 따른 것”이라고 회담 제의 배경을 설명했다. 노 대통령이 박 대표에 이어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등의 대표를 만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 2개월간 몇 차례의 서신과 언론인 간담회 등을 통해 연정론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데 주력해 왔다.
▽“연정 대꾸도 말자더니”=한나라당 내에선 연정론에 무시 전략으로 일관해 온 박 대표가 노 대통령의 회담 제의를 전격 수락한 배경을 놓고 뒷말이 무성했다.
전여옥(田麗玉) 대변인은 이날 “이 실장이 오늘 뭔가 대통령의 메시지를 갖고 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만나자는 것인지는 몰랐다”고 말했다. 회담에 대해 사전 조율이 없었다는 얘기다.
박 대표는 평소 노 대통령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박 대표가 일단 노 대통령의 제안을 수용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 노 대통령의 잇따른 연정 제의와 ‘임기 단축’ 등의 발언으로 정국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만큼 한나라당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혼돈스러운 정국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당 내 분위기는 미묘했다. 지난달 31일 연찬회에서 연정론에 대응하지 말자고 의견이 모아진 바로 다음 날 박 대표가 회담 제안을 수락한 데 대한 반발이 터져 나온 것.
이날 오후 긴급 소집된 최고위원 중진 연석회의에선 회담에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한 당직자는 “상식을 벗어난 발언을 많이 하는 노 대통령에게 말릴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고 귀띔했다.
박 대표는 회의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어젠다가 있다. 의원총회에서 의견을 들어 청와대 회담 문제를 결정하겠다”며 5일 의원총회를 소집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전 대변인은 “청와대 회담은 하는 것이고, 다만 의원총회에서는 의제와 날짜 등에 대해 의견을 수렴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 허를 찌르는 제안 가능성?=회담의 핵심 의제는 연정론이 될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지역구도 극복’이란 명분을 앞세워 박 대표에게 연정 수용을 압박할 가능성이 높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중앙언론사 논설 및 해설 책임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연정론은) 대의와 명분이 있는 얘기인데, (한나라당이) 오래 버틸 수 있겠느냐”며 “(한나라당이) 응답을 하지 않는 한 정치적 수세 국면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는 1일 “노 대통령이 어제 간담회에서 ‘연정론이 마음에 안 들면 정치 개혁론’으로 이해해 달라고 한 대목을 주목해야 할 것”이라며 “연정 거부가 정치 개혁 거부로 비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전했다.
반면 박 대표는 연정 제의에 쐐기를 박고, 경제에 다걸기(올인)를 해 달라는 주문을 할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강재섭(姜在涉) 원내대표는 “이걸로 진짜 끝이다. 연정 이야기를 앞으로는 하지 말라고 못 박는 식의 이야기가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스타일로 볼 때 ‘상상을 뛰어넘는’ 제안을 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유승민(劉承旼) 대표비서실장은 “노 대통령이 우리의 허를 찌르는 제의를 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고 대비 중”이라며 “예컨대 즉석에서 박 대표에게 총리 직을 제의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연정론에 대한 노 대통령과 박 대표의 인식 차가 큰 상황이어서 회담 전망은 밝지 않다. 하지만 예상대로 싱거운 한판이 될지, 의외의 결과가 나올지 뚜껑은 열어 봐야 한다.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靑 “박근혜니까 연정 제안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평소 참모들에게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등 박 대표의 정치 스타일에 큰 관심을 표명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한번은 노 대통령이 ‘대통령선거는 미디어의 영향력이 큰데, 박 대표는 그 점에서 상당한 파괴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두 사람이 단독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만 노 대통령은 이전부터 박 대표에 대해 ‘정치적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대연정 제안도 박 대표의 정치적 특성을 고려한 것이었다는 게 청와대 측의 설명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박근혜니까 대연정을 제안했다”고 단언할 정도다.
박 대표가 대구 경북(TK) 등 영남권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만 과거 3김씨처럼 지역 맹주는 아니라는 점이 노 대통령이 연정 제안을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
이 관계자는 “만약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처럼 특정 지역의 지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지도자가 야당 대표였다면 연정 제안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라며 “박 대표는 지역 패권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일정 정도 지역 기득권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연정이 성사된다면 차기 대권 경쟁에서 여권이 득을 볼지, 한나라당이 득을 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면서 “박 대표가 영남의 압도적인 지지에 호남표 20%만 얻는다면 대권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말도 했다. 박 대표로서는 연정 참여야말로 호남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카드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김정훈 기자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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