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韓日관계 ‘유비무환’

  • 입력 2005년 3월 20일 18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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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제주도 한일 정상회담에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앞으로 과거사 문제를 공식 제기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을 때 양국 사정에 밝은 인사들은 대체로 고개를 갸웃했다.

우선은 과거사 문제가 일본에 대한 현실적 지렛대의 하나라는 점 때문이었다. 여기에다 해마다 봄이 되면 다시 살아나는 다년초 식물처럼 과거사 문제가 뿌리 깊고 복잡한 사안이라는 점 때문에 일본 쪽에서조차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왔던 게 사실이다.

외교행태만 해도 일본은 ‘상대가 한 걸음 물러서면 오히려 한 걸음 다가서는’ 것이 전형적 특성이다. 단적으로 양국간 최대 현안의 하나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과정에서 한국 측이 공산품을 90% 이상 개방(관세품목 기준)하겠다는 과감한 제안을 내놓자 일본 측은 자국 내 ‘사정’을 앞세워 농산품 50% 개방을 치고 나왔고, 현재 협상은 제자리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이처럼 상대의 선의에 뒤통수를 치는 식의 행태로 대응하는 일본에 대해 온 국민이 분하고 괘씸한 감정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문제는 일본 측이 ‘오판’하고 ‘불신’하게 만드는 빌미를 현 정부 들어 제공한 측면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선자 시절 노 대통령 측은 “미국과는 독자적 입장에서 차별화를 시도하겠지만 일본과는 잘 지내고 싶다”는 메시지를 일본에 전달한 일이 있다. 지난해 가을 열린 한 한일 지식인 모임에서는 정부 쪽 외교안보라인의 고위 인사가 “미일동맹이 강화되고 한미동맹이 약화되면 한국이 중국과 협력하는 시나리오도 있을 수 있다”고 발언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한 일본 전문가는 “이런 일들이 ‘동맹’보다 ‘민족공조’를 강조하는 듯한 정부의 태도와 겹쳐 한미일 삼각동맹에서 한국이 이탈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일본 측에 안겨 주었고 최근 ‘한국 이지메’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근본적으로 일본 쪽의 태도에는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에서 표변해 ‘배상책임’까지 들고 나서는 한국 측의 일관성 없는 자세에 대한 불신감이 깔려 있다. 일본 언론들이 최근 노 대통령과 한국정부의 독도-과거사 문제에 대한 강경 대응을 ‘국내정치용’으로 폄훼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노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처음 1년간 ‘불안한 이미지’에서 ‘생각보다 괜찮은 인물’을 거쳐 이제 ‘믿기 어려운 인물’로 변하고 있다고 한 일본 정계 소식통은 귀띔했다.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한국 쪽의 준비 부족도 일본 측의 불신감을 사는 치명적 요인이다.

한 전직 외교관은 “각종 한일협상이 벌어질 때마다 한국정부 대표는 간단한 자료만 들고 들어가 주장을 펴다가 자료를 산더미같이 준비해 와 일일이 논박하는 일본 쪽에 밀리는 것이 일상적 풍경”이라고 말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길을 빌려 달라’는 일본군의 요구에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싸워 죽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길을 빌려 줄 수는 없다)’이라고 답한 뒤 장렬하게 전사했다. 하지만 이제 이 표현은 고쳐져야 할 듯하다.

‘싸워 죽는 일은 쉬운 일이다. 오히려 미리 헤아려 대비하는 일이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동관 정치부장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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