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野, 개헌론 물밑검토 끝냈다

  • 입력 2005년 1월 21일 18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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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내부에서 개헌론이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다. 아직은 다소 뜸이 덜 든 상황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파괴력이 눈 덩이처럼 커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의 임기 말에는 어김없이 개헌론이 나왔지만 야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과거 어느 시기에도 개헌에 대한 여야의 접점이 이처럼 좁혀진 적은 없었다. 내년쯤에는 개헌론이 만개(滿開)할 것이라고 여야가 한목소리를 낼 정도다.

▽여야의 탐색전=지금은 준비기다. 따라서 당 중심에서 논의되지 않고 외곽 연구소를 중심으로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여당 정책연구소인 열린정책연구원(원장 박명광·朴明光 의원)은 올 사업계획안을 만들면서 ‘권력구조 개편연구’를 중점 연구대상에 포함시켰다.

2006년에 대비해 대통령 4년 중임제, 이원집정제, 내각제 등 다양한 권력구조 개편 논의의 기초를 쌓아 놓겠다는 것이다. 연구원은 사업안을 통해 “5년 단임제에 대해 여야가 공히 일련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 2006년 지방선거를 전후로 정치 쟁점으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그 배경을 밝혔다. 연구원의 핵심 인사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대비해 미리 여러 개의 카드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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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도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김덕룡(金德龍) 원내대표는 21일 당직자회의에서 “열린우리당이 개헌 문제를 올해 어젠다로 삼았다.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 등 매년 선거를 치르는 상황에서 문제 제기가 옳은 점도 있다”며 검토 필요성을 제기했다. 박세일(朴世逸) 정책위의장도 “내가 여의도연구소에 있을 때 이미 검토해 왔다”며 “우리도 스토리가 있다. 견해를 내놓을 것”이라고 동조했다.

한나라당은 그러면서도 여권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개헌 논의가 단순한 선거 주기 조정 차원을 넘어 권력구조의 큰 틀을 바꾸는 방향까지 망라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어디로 가나=‘4년 중임제’에 여야 지도부가 공감하고 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를 비롯한 여야의 잠재적인 대통령후보군도 중임제를 선호하는 쪽이다. 2007년 대선 4개월 뒤에 18대 총선이 예정돼 있는 만큼 17대 국회의원 임기를 몇 개월만 앞당기면 중복선거와 사생결단의 ‘다걸기(올인)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남북관계가 급진전하면서 여권이 통일헌법 쪽으로 개헌 논의를 몰아갈 가능성도 의심한다. 여권의 남북정상회담 주력도 같은 맥락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 물론 여권은 이 같은 의심을 “불확실한 상황을 가정한 정략적 상상”이라며 일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내각제 개헌론이 불거질 수도 있다. 대통령제의 지나친 권력집중과 지역 쟁투의 부작용을 완화시키는 한 대안으로 내각제를 선호하는 인사도 꽤 있으며 특히 한나라당 중진들 중에 대통령제에 염증을 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개헌론은 여야간 몇 차례 선문답과 물밑논의 과정을 거쳐 뜸이 들면 폭발적으로 분출할 가능성이 크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개헌론 왜 불거지나▼

정치권에서 개헌론이 불거지는 배경엔 다양한 원인이 작용하고 있다.

우선 본보가 연초 ‘뉴스타트’ 시리즈(본보 1월 6일자 A3면 보도)에서 지적한 것처럼 ‘선거 과잉’에 따른 국민적 불만이 만만찮다.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총선, 대통령 선거 등 전국 단위 선거가 다른 주기로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실제 1995년 이후 지난해까지 10년 동안 전국 단위 선거가 없었던 해는 1999년, 2001년, 2003년 등 3개년에 불과했다.

잦은 선거에 드는 비용은 천문학적 수준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1995년부터 10년 동안 전국 단위 규모의 선거는 모두 8차례로 여기에 들어간 돈은 1조4669억 원이었다는 것. 선거 한 번에 평균 1858억 원이 소요된 셈이다.

그러나 공식 비용에 잡히지 않는 음성적인 비용까지 고려한다면 실제로 사용된 선거비용은 선관위 공식 집계의 3, 4배라는 게 정치권의 ‘상식’이다.

선거비용은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인구 증가에 따른 선거관리 비용의 증가 때문이다.

1997년 15대 대선 때 1235억 원이었던 선거비용이 2002년 16대 대선에선 1377억 원으로 늘었다. 국회의원 선거비용도 △1996년 15대 1152억 원 △2000년 16대 1363억 원 △2004년 17대 2189억 원으로 급증했다.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는 정치권의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이다. ‘승자 독식’ 법칙이 국민 통합보다는 사생결단식 편 가르기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여야의 극한 대치는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혐오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선거 주기가 서로 달라 대통령과 의회 권력, 지방 권력 사이에 발생하는 ‘불일치’도 극복할 대상이다. 대선 이후 실시되는 총선이나 지방선거는 사실상 ‘중간평가’의 성격을 띠게 돼 대통령의 임기 중반 권력 누수(레임덕)를 앞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차제에 대통령제 등 권력 구조 자체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시대 상황이 18년이 지난 지금엔 크게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한 소장파 정치학자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로 이뤄진 1987년 5년 단임제 개헌은 특정 정권의 장기 집권을 막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며 “민주화 세력이 사회 주도 세력이 된 상황에서 ‘1987년 체제’를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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