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저격사건 문서공개]저격사건 후폭풍

  • 입력 2005년 1월 20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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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광(文世光)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은 이후 한국의 권력과 정치 지형을 뒤흔드는 후폭풍을 몰고 왔다.

사건의 책임을 지고 상당수 권력자들이 옷을 벗었다. 뒤를 이어 새로운 실세가 등장했다. 5년 후인 1979년 박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몬 10·26사태의 서막이 여기서 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래픽뉴스]1974년 8월15일 '박정희 저격사건' 재구성

▷[화보]박정희 저격 사건

▽차지철의 부상, 박정희 사망의 단초=사건 발생 6일 만인 1974년 8월 21일 ‘피스톨 박’으로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박종규(朴鐘圭) 대통령경호실장이 경질됐다. 박 실장은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최고회의 의장 안보특보를 시작으로 1963년부터 11년 동안 경호실장을 맡았던 ‘박정희의 그림자’였다.

후임 경호실장에는 과격한 성격의 차지철(車智澈) 국회 내무위원장이 기용됐다. 이때부터 권력의 추는 급격히 차지철 쪽으로 기울게 된다. 차 실장은 1963년 중령으로 예편한 후 국회로 진출해 4선 의원의 길을 달렸다. 경호실장에 기용된 뒤 차 실장은 과도한 정치 개입을 하게 된다. 당연히 다른 권력기관의 질투를 불렀고, 권력 내부의 갈등이 커졌다.

차 실장은 1976년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김재규(金載圭)와 충성 경쟁을 벌이게 된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김 부장은 차 실장에게 번번이 밀렸고, 박 대통령은 차 실장을 총애했다. 차 실장의 전성기였다.

김 부장은 차 실장에 대한 원한과 박 대통령으로부터의 소외감을 키워갔다. 이들의 갈등은 1979년 10월 부마사태 대책을 둘러싸고 최고조에 이르렀으며, 차 실장의 강경론이 채택되자 김 부장은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급기야 김 부장은 10·26사태를 일으켜 두 사람을 사살한다.

역사에 가정(假定)이란 무의미한 일이지만, 만일 문세광 사건이 없었더라면 ‘차지철 경호실장’도 없었을 것이고, 10·26사태의 씨앗이 된 김재규와 차지철의 갈등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박 대통령의 ‘사생활’도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서거한 뒤 균형과 절제를 잃어갔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박 대통령이 전보다 예민해지고 의심이 많아지며 여성 편력이 잦아졌다는 점은 당시 관계자들의 여러 증언 및 저술에서 확인된다. 술에 의지하는 일도 점점 많아졌다. 일명 ‘채홍사(採紅使)’로 불렸던 박선호 당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은 10·26사태를 박 대통령의 ‘타락’과 연관지어 진술하기도 했다.

▽줄 사표 사태=육 여사의 장례식 다음날인 1974년 8월 20일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를 비롯한 내각 전원, 대통령수석비서관, 공화당 간부, 서울시장, 주일 대사가 모두 사표를 제출했다. 박 대통령은 치안 총수인 홍성철(洪性澈) 내무부 장관과 박종규 경호실장의 사표만 수리했지만, 당시 휴가 중이었던 김 총리는 여론의 질타에 시달려야 했다.

당일 8·15광복절 경축식 행사를 맡았던 양택식(梁鐸植) 서울시장은 사건 당시 단상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보도로 곤욕을 치르다 경질됐다. 서울 중부경찰서장 등 경찰 26명도 파면됐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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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0월 경북 의성군 건설현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당시 건설부 장관이 수행하고 있다.

▼陸여사 장례식▼

1974년 주홍콩 총영사관에 차려진 육영수 여사의 분향소에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조의품으로 접수됐던 사실이 밝혀졌다.

20일 공개된 육 여사 장례식에 대한 문서 가운데 주홍콩 총영사가 1974년 8월 27일 본국으로 보낸 문건에 따르면 홍콩 총영사관 분향소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메달 크기·가로 3cm, 세로 4cm) 1개가 접수됐다. 목걸이를 내놓은 사람은 ‘재홍콩 교포 우영순(禹英順)’으로 나타나 있다.

홍콩 총영사관은 목걸이를 대통령비서실로 보내면서 “(우 씨에게) 정중한 사의를 표하고 반환 조치하기 바란다”고 요청했다. 당시 우 씨가 자녀와 함께 서울에 체류 중이었기 때문.

그러나 대통령비서실은 비서실장 명의로 외무부 장관을 통해 “당해 지역 주재 영사로 하여금 본인에게 반환토록 하고 그 결과를 회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고 답신했다. 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결국 우 씨에게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당시 박정희 정권은 육 여사의 장례 절차에 대해 상당히 고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원수의 장례 절차는 있지만 그 부인에 대해선 특별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 결국 육 여사의 장례식은 ‘국민장’ 형식으로 8월 19일 오전 10시 당시 중앙청 앞에서 열렸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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