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잘못된 과거 會計' 소송회오리 우려

  • 입력 2004년 12월 1일 06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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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이 내년 1월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 발효에 앞서 과거 분식(粉飾) 회계에 대한 사면을 요구한 것은 법 시행 이후 자칫 해당 기업들을 상대로 한 집단소송이 봇물을 이루는 등 엄청난 파장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집단소송법은 법 시행 이후에 이루어진 행위에 대해서만 문제를 삼고 있다. 그러나 재계는 회계의 특성상 과거의 분식회계가 수년에 걸쳐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내년부터 갑자기 과거와 단절하고 ‘깨끗한 재무제표’를 작성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청원 왜 냈나=집단소송법에 따르면 기업의 분식회계나 회계법인의 부실감사, 허위공시 및 주가조작 등의 불법행위로 인해 다수의 소액주주들이 손해를 입은 경우 집단소송을 낼 수 있다.

재정경제부와 법무부가 공동 발의한 이 법안은 2003년 말 국회에서 통과됐으며,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하도록 돼 있다.

재계는 주가조작이나 허위공시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다만 분식회계 부분에 문제가 많다고 주장하고 있다.

관련법이 시행되면 피해주주 50명 이상이 0.01% 이상의 지분을 갖고 집단소송을 내서 승소할 경우 소송을 내지 않았지만 동일한 케이스로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자동으로 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한번 소송에 휘말리면 해당 기업은 문을 닫아야 하는 극단적인 경우까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재계의 주장이다.

이 법 부칙 제2항인 “이 법은 법 시행 후 최초로 행해진 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분부터 적용한다”는 조항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다.

즉 12월 결산법인의 경우 2004년 영업활동을 반영하게 되는 재무제표가 내년 3월경 주주들에게 보고 되는데 여기에 나타난 과거의 분식회계 사실에 면죄부를 줄 것인지, 아닌지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분식회계가 손해배상 청구소송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부칙 2항의 해석을 명확히 해달라는 것이 재계의 주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2005년 1월 이후 벌어진 분식회계만 처벌대상으로 삼아 과거의 족쇄는 기업들이 스스로 풀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다.

▽재계의 걱정=재계는 모든 기업에서 사실상 관행화돼 왔던 과거 분식회계를 사면해 주지 않을 경우 갑작스러운 회계 충격으로 기업의 신뢰하락이 겹치면서 부도 가능성까지 우려하고 있다.

투자자들이 집단소송을 낼 경우 막을 방법이 없는 데다 한꺼번에 분식회계를 털어내면 과거 기아자동차나 한보철강처럼 기업의 연쇄도산과 대외신인도 하락까지 불러올 수 있다는 것.

재계 관계자는 “퇴로를 열어주고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며 “법안을 그대로 시행해 과거 분식회계를 한 사실이 노출되면 대기업들은 소송 회오리에 휘말려 정상적인 영업활동이 어렵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장 관련 법안이 발효되기 전에 이번 정기국회 내에 어떤 형태로든 보완해 달라는 주문이다.

정부는 과거 분식회계 사실을 내년 결산 때 ‘전기(前期) 오류수정’으로 바로 잡을 경우 집단소송 대상에서 제외하고, 소송제기 요건도 엄격하게 바꾸는 방안을 열린우리당측과 협의 중이다. 하지만 개혁입법의 취지를 훼손할 것이라는 여당 내 지적도 만만치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후문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재계는 과거 분식회계에 대해 민사상 형사상 사면까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소송에서만 제외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 법이 그대로 시행되면 과거의 분식회계까지 집단소송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소급입법이 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공종식기자 kong@donga.com

▼정치권 엇갈린 반응▼

“재계 주장에 일리는 있지만 자칫하면 ‘반(反)개혁’으로 몰릴까봐….”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재계의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 부칙개정 요구에 대한 정치권의 속내는 복잡하다.

특히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노무현(盧武鉉) 정부 개혁법안의 상징처럼 돼 있는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도에 반대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데다 과거 분식회계로 처벌받은 기업인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이유로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야 가릴 것 없이 기업의 현실을 아는 재계와 관료 출신 의원들은 적어도 부칙만은 바꿔줘야 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낸다. 결국 여야보다는 기업 현실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개별의원들이 찬반(贊反) 의견으로 갈리는 배경인 셈이다.

현대카드 회장 출신인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소속 이계안(李啓安·열린우리당) 의원과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을 지낸 이종구(李鍾九·한나라당) 의원이 지난달 24일 청원을 김원기(金元基) 국회의장에게 ‘소개(紹介)’한 것도 “재계의 청원에 타당한 면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이들은 소개 의견서에서 “증권집단소송법 부칙 제2항은 이 법 시행일 이후에 발생한 사건부터 소송대상이 되도록 하자는 부칙조항의 제정취지와 법률불소급 원칙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경제통’이 많은 재경위 소속 의원들은 청원에 대체로 공감하는 입장이지만 증권집단소송제도를 대기업 출자총액제한,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과 함께 재벌개혁의 한 ‘패키지’로 보는 열린우리당 내 386 의원들 사이에선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386 출신의 한 초선 의원은 “재계가 이런 저런 이유로 엄살을 부리면서 증권집단소송제도를 회피하려는 것은 재벌개혁 취지와 상반된다”면서 “당장 시민단체 등에서 문제 제기를 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쉽게 물러설 수 없는 법안이다”고 주장했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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