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위는 왜 존재하는가

  • 입력 2004년 7월 1일 23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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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위원회가 편파 시비를 불러온 탄핵방송에 대해 ‘각하’ 결정을 내린 것은 공정성 위반 여부에 대한 판단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는 “불공정하다는 주장은 이유 없다”는 ‘기각’ 결정과 크게 다르다. 기각은 사실상 탄핵방송이 공정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번 ‘각하’ 결정은 방송위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자가당착이라는 게 언론학자들의 중론이다. 방송위가 애초 탄핵방송 전반에 대해 심의하기로 결정한 뒤 정밀 분석을 위해 한국언론학회에 연구를 의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학회 보고서가 탄핵방송이 불공정했다고 결론 내리고 이에 방송사들의 거센 반발이 뒤따르자 방송위가 면피를 위해 발뺌했다는 지적이다. 특히 결정을 내리기까지 방송위원들은 서로 진흙탕 논쟁을 벌여 적지 않은 후유증도 남기게 됐다.

▽심의 대상 아니다?=다수의 프로그램을 대상으로 한 포괄적 심의의 법적 근거가 없다는 방송위의 주장은 변호사인 조용환(趙庸煥) 비상임위원이 지난달 30일 처음 제기했다. 조 위원은 “국가권력의 일부인 방송위는 법에 의해 개입할 수 있는데, 법에 따르면 탄핵방송 전반이라는 추상적 사안에 대해선 심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윤종보(尹鍾保) 비상임위원은 “방송심의규정에 따라 주제의 동일성이 인정되는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전체적인 심의가 가능하다”고 반박했다. 양휘부(梁輝夫) 상임위원도 “수해(水害)방송이나 선정성이 두드러진 일련의 프로그램에 대해 포괄적 심의를 한 전례가 있다”고 말했다.

양측의 의견차는 법 해석을 달리하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황근(黃懃) 선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공정성 시비를 낳은 프로그램에 대한 심의는 방송위의 의무”라고 말했다.

▽공정성 심의 포기하는가?=탄핵방송 심의에 반대하는 위원들은 “탄핵방송이 불공정하다는 모호한 민원을 왜 심의 안건으로 올렸느냐”며 방송위 사무처 직원을 추궁했다.

이효성(李孝成) 부위원장은 회의 과정에서 “탄핵방송은 정치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이므로 공정성 위반 여부를 심의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박준영(朴埈永) 상임위원은 이에 맞서 “방송법과 규정에 공정성 심의를 하도록 돼있는데도 정치 문제여서 심의할 수 없다면 이 법에 의해 구성된 위원회도 필요 없다는 말인가”라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한편 방송위는 앞으로 민원인들의 공정성 심의 요구 절차를 까다롭게 규정해 관련 심의를 신중히 한다는 입장이다. 방송의 공정성에 대한 문제 제기 자체가 어려워지게 되는 셈이다.

▽책임론 제기=탄핵방송과 같은 예민한 사안에 대한 결정을 미룸으로써 소모적 논쟁을 불러온 방송위에 대한 책임론 제기도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유재천(劉載天) 한림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언론학회에 분석을 의뢰해 놓고 심의를 못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뒷날 기록으로 남아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창현(李昌炫)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포괄적 심의를 할 수 없다는 방송위의 결정은 의미가 있지만 방송위의 매끄럽지 못한 일처리 때문에 불필요한 혼란이 왔다”고 지적했다.

한편 방송 3사는 이번 각하 결정을 메인 뉴스에서 다루며 대체로 환영하는 반응을 보였다. KBS 이규환(李圭煥) 기획제작국장은 “탄핵방송이 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공영방송은 방송위가 아닌 국민의 뜻에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MBC 구본홍(具本弘) 보도본부장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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