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경제개혁 현장르포]“남측손님 일제냉장고 싸게 사세요”

  • 입력 2004년 6월 2일 17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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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 안돌아 싸게 팔아요”지난달 27일 북한 평양시 대성판매소의 이선화 지배인(왼쪽)이 남성욱 고려대 교수에게 “500유로짜리 수입 냉장고를 20% 할인된 가격에 팔겠다”고 권하고 있다. 사진제공 남성욱 교수
“현금 안돌아 싸게 팔아요”
지난달 27일 북한 평양시 대성판매소의 이선화 지배인(왼쪽)이 남성욱 고려대 교수에게 “500유로짜리 수입 냉장고를 20% 할인된 가격에 팔겠다”고 권하고 있다. 사진제공 남성욱 교수
《4월부터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남북경협사업 담당자들이 잇달아 중국을 방문해 중국식 경제개혁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있다. 북한은 ‘실리(實利) 사회주의’를 목표로 경제개혁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고려대 남성욱(南成旭·사진) 북한학과 교수가 5월 24일부터 29일까지 남북경제연합회 부회장 자격으로 북한을 다녀왔다. 남 교수는 평양과 남포의 경제개혁 현장을 둘러봤다.》

북한은 2003년 3월 시장을 공식 유통수단으로 인정하고 종합시장을 도입하는 등 본격적인 경제 개혁을 시작했다. 매점과 거리의 실물경제 현장에서는 가격 개혁을 포함한 유통개혁 장면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대성판매소 이선화 지배인(여)은 지난달 27일 남측에서 온 손님인 나에게 “4개월 전 중국에서 수입한 500유로짜리 일제 샤프 냉장고의 값을 20% 깎아서 396유로에 팔겠다”고 제의했다.

북한에 할인점이 생겼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흥정을 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국영상점 등 판매점들이 손님에게 많이 판 만큼 수입을 더 올릴 수 있도록 한 2002년 시작된 7·1경제관리 개선조치가 낳은 변화였다.

이 지배인은 “현금이 안 돌아 죽겠다”며 “팔리지 않으면 손해가 커지므로 국가의 허락을 받아 싸게 팔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평양시 보통강구역 한 대로변의 복권판매소에 들렀다. 남측의 주택복권 판매소처럼 생긴 초소에서 한 여성 판매원이 ‘13차 체육복권’을 팔고 있었다.

판매원은 “한 달에 한번 추첨을 해서 당첨되는 사람에게는 운동복과 밥솥 등 생활용품을 경품으로 준다”고 설명했다. 수익금은 체육인 지원에 쓰이는 것으로 보였다.

간이매대의 서비스도 다양해졌다. 원래 먹을 것을 파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시계 수리상이나 담배 라이터에 가스를 넣어주는 매대도 보였다.

지난달 28일 방문한 남포시 남포경공업공장의 피복공장에서는 여성 근로자들이 재봉틀을 돌리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공장의 선전구호
경제개혁 작업이 진행 중인 북한에서는 공장 마다 새 기술을 개발해 제품의 질을 높이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남포시 남포경공업공장 마당 게시판에 선전구호가 요란하다. 사진제공 남성욱 교수

정구운 공장 외사과장은 “일 잘하는 사람은 월급이 5000원이지만 못하는 사람은 3000원”이라며 “모두 불량률을 낮추고 목표량을 달성해 더 많이 벌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1995년 대우 김우중(金宇中) 회장이 500만달러를 투자해 세운 이 공장은 남북경협의 열악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1만평 규모의 공장에서는 3000여명이 일할 수 있지만 이날 현재 400여명의 근로자만이 일감을 얻어 일하고 있었다.

정 과장은 “남측의 주문이 일정하지 않아 공장 가동률이 낮다”고 말했다. 사정을 들어보니 남측 기업이 이곳에서 위탁가공을 해 이윤을 많이 남기기는 어려워 보였다.

대부분의 기업은 이곳에 원자재를 들여와 낮은 임금으로 의류, 봉제 제품 및 가방 등을 만들어 다시 반출해 간다. 그러나 인천과 남포를 배로 오가는 물류비가 너무 높았다.

20피트 컨테이너 1개의 운반비용이 700달러나 되기 때문에 아무리 인건비가 싸도 이윤이 크게 남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 오광식 광명성총회사 사장은 “그래도 남북경협 여건이 최근 몇년간 획기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원료와 제품의 육로 수송의 개선이 무엇보다 시급해 보였다.

이에 비해 개성공단은 육로 이용이 가능해 물류 이동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거리에서 만난 북한 주민들은 “(용천 참사에 대한) 남측의 도움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나 더 구체적인 내용을 물으면 잘 모르겠다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초청 단체인 ‘민족경제연합회’에 용천 복구 현장에 가보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정중하게 거절당했다. 아직 남측 인사에게는 현장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다.

지난달 29일 평양시 순안공항에서 만난 국제적십자 요원 제이와 로라(여)는 참사 현장의 상황을 상세하게 전했다. 두 사람은 국제적십자가 모금한 10만달러 상당의 의약품을 전달하기 위해 용천 현장을 직접 방문했다.

제이씨는 “용천 참사 현장에 군인들이 대규모로 동원되면서 복구가 이제 막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며 “북한 당국은 두 달 안에 복구를 완료하겠다고 벼르고 있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1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로라씨는 “철골 골조 없이 지어올린 대부분의 건물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며 “건물 잔해 더미를 밑바닥부터 제거해야 하는데 불도저 등 중장비가 부족해 인부들이 손수레와 삽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에 따르면 사고 후 한 달이 지났고 국제사회의 지원이 쇄도했지만 상황은 크게 나아진 편이 아니었다. 제이씨는 화상을 입은 환자를 치료할 의약품이 크게 부족해 국제적십자 베이징(北京) 사무소와 추가 지원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출국하는 길이라고 했다.

평양 남포=고려대 남성욱 교수 skysung@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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