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대통령과 재벌총수 사이

  • 입력 2004년 5월 24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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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국무조정실장은 대통령 정책수석 경제수석 같은 요직도 거쳤지만 30, 40대 시절엔 수많은 대기업 중소기업과의 접점에서 일한 상공부 관료였다. 그가 며칠 전 기자들에게 말했다.

“공무원이 몇 마디 하면 기업인들은 ‘맞습니다 맞고요’를 연발한다. 그러면 공무원은 기업인도 만족했다고 착각한다. 기업인이 할 말 못하고 쩔쩔매는 것은, 대놓고 필요한 것을 요구할 경우 공직자의 눈 밖에 나는 괘씸죄가 두렵기 때문이다. 현실이 이렇다.”

▼기업을 놓아주지 않는 권력▼

공무원과 기업인 관계의 정점에 대통령과 재벌총수들이 존재한다. ‘제왕적 회장님’이라는 말처럼 총수 파워가 막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과의 관계에선 전혀 다른 모습이다. 어느 회장의 술회다. “5년마다 상석의 주인(대통령)은 바뀌지만, 우리는 언제나 살아있는 상석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지요.”

지난 이야기다. 김영삼 대통령이 재벌총수들을 불렀다. 어떤 회장은 지각할까봐 두 시간 전에 청와대 부근에 미리 가 있었다. 그런데 폭설 때문에 대통령이 나타날 때까지 도착하지 못한 회장이 있었다. 사색이 된 것은 다른 참석자들이었다. 모 회장의 회고다. “내 간이 다 콩알만 해지더라고요. 국제그룹이 전두환 대통령의 부름에 지각한 양정모 회장 때문에 공중분해됐다는 소문도 있었잖습니까.”

뒤늦게 도착한 당사자는 김 대통령에게 90도 절을 하며 “죽을죄를 지었습니다”고 해서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대통령의 ‘심기’에 따라서는 다른 결과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현대그룹이 정주영 명예회장의 92년 대선출마 악연 때문에 YS 임기 중에 당한 수난사는 한국 기업사의 일부다.

97년 12월 19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기자회견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모든 기업을 권력의 사슬로부터, 권력의 비호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킬 것”이라는 선언이 특히 그랬다.

그러나 DJ 정부는 모든 기업을 해방시키지 않았다. 어떤 재벌은 정권과 동업관계가 되기도 했고, 어떤 재벌은 “교묘한 방법으로 차별과 불이익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지난해 5월 노무현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 기업인들도 대거 함께 갔다. 이럴 경우 일본에선 ‘동행’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수행’이라고 한다. 아무튼 재벌총수들을 지켜본 관리가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고 한다. “회장님들이 우스꽝스럽고, 불쌍하더군요. 비좁은 승합차에 끼어 앉아 땀을 뻘뻘 흘리고, 대통령이 도착할 때까지 모두들 장시간 대기하고, 행사 끝나면 또 승합차 찾느라 헐레벌떡 뛰어다니고….”

이들이 오늘 노 대통령과 회동한다. 대통령의 직무복귀와 권력완성을 축하하고, 대선자금 수사에서 해방된 재벌들을 위무하기 위한 자리는 아니다.

덕담도 못할 거야 없지만 지켜보는 국민의 심정은 절박하다. 이대로 가다간 지는 해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을지도 모르는 경제, 그 응달에서 시들고 있는 민생에 돌파구를 여는 만남이어야 한다.

그러자면 한 실장이 말한 공무원과 기업인 관계를 솔선해서 깨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대통령이 ‘개혁 저항’을 경고한 뒤끝이라 회장들이 솔직해지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대통령부터 진정으로 마음과 귀를 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커녕 기업할 수 있는 나라만 돼도 좋겠다는 비명이 왜 나오는지 확실히 파악해야 한다.

▼오늘 왜 만나야 하나▼

회장들은 투자에 힘쓰겠다고 성의를 보이고, 대통령은 더 잘 해달라고 부탁하겠지만 서로 핵심을 비껴가면 실효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들은 지난해 늦봄에도 삼계탕 식당에서 웃음꽃을 피웠으나 주고받은 약속은 흔적이 없다.

특히 대통령은 시장을 충분히 안심시킬 메시지를 내놓아야 한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이번에도 실기(失機)하면 경제 살리기의 희망이 더 멀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현안의 기업정책과 노사문제들에서 시장원칙을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다. 투자와 일자리를 늘리기 위한 정책 선택을 망설여서는 안 된다.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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