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기각]문재완/우리는 ‘法治’를 얻었다

  • 입력 2004년 5월 14일 17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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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는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보다 약 20만표를 더 얻고도 대통령 당선자가 되지 못했다. 주별로 표를 더 얻은 후보자가 그 주의 대통령 선거인단을 모두 가져가는 미국 선거제도 때문이었다. 게다가 플로리다주에서는 부정선거, 관권선거 시비까지 있었다. 결국 민주당은 이 문제를 법원으로 가져갔다. 누가 차기 대통령인지를 놓고 ‘국론’은 분열됐다. 이 혼란은 한 달여 뒤 미 연방대법원과 고어 후보에 의해서 종식됐다. 대법원이 5 대 4로 부시 후보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고어 후보는 이 결정에 승복했고, 정치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미국 헌법학계는 이 판결을 혹독하게 비평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부시 후보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미국의 헌법재판도 사실은 국민의 뜻과 상관없는 사건에서 시작됐다.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대선에서 패하자 퇴임 직전 연방법원 판사를 대거 임명한다. 그중 한 사람인 마버리는 전직 대통령이 서명한 임명장을 전달받지 못한 사이에 토머스 제퍼슨이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임명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는다. 그가 임명장을 달라고 제기한 소송이 유명한 ‘마버리 대 매디슨’ 사건이다. 주심을 맡은 마셜 대법관은 전 대통령이 임명장에 서명할 때 국무장관으로 옆에서 보좌했던 인물이다. 마셜 대법관은 대통령이 서명한 이상 그 임명장은 유효하다고 판단했고, 미국 헌법에 명문의 규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는지는 법원이 결정한다고 선언했다. 미국 헌법학계는 이 판결 역시 비판했다. 하지만 미국은 세계 최초로 위헌법률심사권이라는 새 제도를 갖게 됐다.

헌법재판소는 14일 대통령 탄핵소추라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여 만에 기각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만큼 우리 국민을 분열시킨 사건도 흔치 않다. 한편에서는 ‘의회민주주의의 승리’를 외치고, 다른 편에서는 ‘의회 쿠데타’로 규정하고 거리로 나갔다. 헌재의 탄핵기각 결정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다. 탄핵 때문에 헛되이 날려버린 국력을 개탄하는 목소리도 있을 수 있고,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알려준 소중한 학습의 기회였다는 평가도 나올 수 있다. 이번 탄핵심판의 대차대조표가 빨간색을 면하는 것은 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시각과 자세에 달려 있다고 본다.

탄핵심판 과정을 돌이켜보면 법과 제도가 미흡하기도 했고, 또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법치와 민의를 존중하고 이를 국정 운영의 기준으로 삼는 전통을 세우는 계기로 삼을 때 탄핵기간은 ‘잃어버린 두 달’이 아닌 ‘도약을 위한 준비기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얻은 것은 법치주의였다. 대통령도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면 파면될 수 있다는 점, 하지만 그러한 절차 역시 헌법과 법률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 그 요체다. 이제 시급한 과제는 잃어버린 대통령의 권위를 회복하는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인위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법을 존중하는 자세를 견지할 때 대통령의 권위는 저절로 세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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