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헌법재판도 사실은 국민의 뜻과 상관없는 사건에서 시작됐다.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대선에서 패하자 퇴임 직전 연방법원 판사를 대거 임명한다. 그중 한 사람인 마버리는 전직 대통령이 서명한 임명장을 전달받지 못한 사이에 토머스 제퍼슨이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임명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는다. 그가 임명장을 달라고 제기한 소송이 유명한 ‘마버리 대 매디슨’ 사건이다. 주심을 맡은 마셜 대법관은 전 대통령이 임명장에 서명할 때 국무장관으로 옆에서 보좌했던 인물이다. 마셜 대법관은 대통령이 서명한 이상 그 임명장은 유효하다고 판단했고, 미국 헌법에 명문의 규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는지는 법원이 결정한다고 선언했다. 미국 헌법학계는 이 판결 역시 비판했다. 하지만 미국은 세계 최초로 위헌법률심사권이라는 새 제도를 갖게 됐다.
헌법재판소는 14일 대통령 탄핵소추라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여 만에 기각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만큼 우리 국민을 분열시킨 사건도 흔치 않다. 한편에서는 ‘의회민주주의의 승리’를 외치고, 다른 편에서는 ‘의회 쿠데타’로 규정하고 거리로 나갔다. 헌재의 탄핵기각 결정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다. 탄핵 때문에 헛되이 날려버린 국력을 개탄하는 목소리도 있을 수 있고,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알려준 소중한 학습의 기회였다는 평가도 나올 수 있다. 이번 탄핵심판의 대차대조표가 빨간색을 면하는 것은 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시각과 자세에 달려 있다고 본다.
탄핵심판 과정을 돌이켜보면 법과 제도가 미흡하기도 했고, 또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법치와 민의를 존중하고 이를 국정 운영의 기준으로 삼는 전통을 세우는 계기로 삼을 때 탄핵기간은 ‘잃어버린 두 달’이 아닌 ‘도약을 위한 준비기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얻은 것은 법치주의였다. 대통령도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면 파면될 수 있다는 점, 하지만 그러한 절차 역시 헌법과 법률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 그 요체다. 이제 시급한 과제는 잃어버린 대통령의 권위를 회복하는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인위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법을 존중하는 자세를 견지할 때 대통령의 권위는 저절로 세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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