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84/총선]엷어진 지역色… ‘텃밭 싹쓸이’ 사라지나

  • 입력 2004년 3월 31일 19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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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해 끌어내면 대안이 뭐요. 대통령 자리를 한나라당에 내줄 수는 없잖소.”

지난 주말 광주에서 만난 한 택시운전사는 탄핵 사태 후 중장년층에서 민주당 후보보다 중량감이 떨어지는 열린후보당 후보가 높은 지지율을 얻는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3김 시대가 마감되면서 특정 정치지도자의 정당이 텃밭을 싹쓸이하는 맹목적 지역주의의 퇴조는 지난 대선 때 조짐을 보인 데 이어 이번 선거에서 한층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더욱이 이번 총선에서는 ‘찬(贊)탄핵-반(反)탄핵’ 논쟁으로 호남 대 영남의 대결 구도가 무너지는 양상이다. 그럼에도 지역주의의 완화속도는 아직 완만하다. 지역에 따라서는 지역주의가 새로운 패턴으로 잔존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부산 경남=16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이 이곳에서 모든 의석을 석권했지만 이번에는 이런 싹쓸이 현상은 크게 완화될 전망이다. 아직도 바닥에 남아있는 반DJ 정서가 한나라당의 근근한 밑천이 되고 있지만 이 지역 출신인 노 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탄핵안 가결 이후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이와 함께 세대교체에 대한 열망과 인물론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다. 부산에서 만난 한 한나라당 후보는 “탄핵 문제에 대해서는 양비론(兩非論)이 강하고 지역감정은 줄어들고 있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간의 경쟁이 가파르게 전개되면서 후보 개인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 경북=대부분의 지역구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열린우리당 후보를 다시 앞서는 재역전극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 현상이 과거와 같은 지역주의로의 회귀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가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 대표가 되었다면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거리와 시장에서 만난 40대의 열린우리당 지지자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 대해 필자가 부정적인 말을 하면 은근히 화난 표정으로 변했다. ‘박정희 향수’이자 근대화에 대한 향수가 특정 정당에 대한 호불호보다 강한 셈이다.

보수 성향이 강한 60대 이상의 노인층과 40대 가운데는 민주당 조순형(趙舜衡) 대표를 밀어줘야 한다는 이도 없지 않다. 특히 지식인 사회에서는 “조 대표가 낙선하면 우리가 지역주의에 얽매인 투표를 했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고 난처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광주 전남=이 지역 유권자들은 지역주의라는 단어 자체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촛불집회도 서울에 비해 조용한 편이었다. 광주 서구에서 자영업을 하는 P씨는 “과격하게 흘러서 다른 문제로 불똥이 튀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주민들의 정서에는 민주당이냐 열린우리당이냐의 선택 이전에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이 깊이 스며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지역주의가 완전히 극복됐다고 보기 어려운 셈이다.

특히 주민들은 탄핵이 ‘한-민 공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민주당의 한 지구당 당직자는 “노 대통령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민주당을 깼다는 ‘배신자론’이 이미 먹혀들지 않고 있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다만 광주를 방문한 박근혜 대표에 대해 중장년층이 시큰둥했던 데 반해 젊은층에서 다소 호의적 개방적 반응을 보인 것은 지역감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세대의 특성 때문으로 풀이된다.

임경훈·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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