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칼럼]윌슨은 살아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04년 2월 27일 18시 59분


학교 때 3·1운동에 대한 시험엔 민족자결주의와 윌슨이 꼭 들어 있었다. 3·1운동에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가 영향을 미쳤다는 건 외워야 했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민족자결주의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땅하고도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같은 민족이면서 한쪽은 핵을 등에 업고 세계 최강대국을 상대로 벼랑끝 전술을 펼치는데 또 한쪽은 어떻게든 파국을 면하려 양편 눈치를 살피고 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기구하긴 마찬가지다.
▼민족자결주의는 환상인가 ▼
민족자결주의에 일본 식민지였던 우리나라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도 배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 아름다운 주의(主義)가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유럽 식민지와 중앙아시아의 영토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특히 그 땅에 공산주의가 파고드는 걸 막기 위해 나왔다는 사실은 주요 문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거칠게 말하면, 유관순 누나를 비롯한 우리의 용감한 선조들은 윌슨이 한국 따위엔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을 몰랐든가, 혹은 알면서도 어쨌든 민족자결 원칙에 따라 우리도 독립돼야 한다고 만세를 불렀던 셈이다. 민족자결도 최소한 강대국의 이해관계와 연관돼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힘의 논리엔 무지했거나, 애써 무시했거나 아니면 강력히 도전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기미독립선언문대로 위력의 시대가 거(去)하고 래(來)해야 할 도의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제국주의 강권침략시대가 막강해졌을 뿐. 결국 민족자결주의란 달콤한 수사(修辭)였다. 자결할 능력 없는 민족이 민족자결이란 환상에 빠지는 건 두 번 죽는 일이라고 역사가 일깨워 주고 있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것은 또 있다. 윌슨이 남긴 사상이 민족자결주의가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윌슨주의(Wilsonianism)의 핵심은 세계가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하게 지켜져야만 하고 이를 위해 미국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거다. 미국 외교정책의 근간이 된 윌슨주의는 지금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서 더 활활 불타는 중이다.
윌슨처럼 취임 초엔 국제문제에 별 관심 없던 부시 대통령이었다. 9·11테러는 미국의 안전과 이익을 지키려면 선제공격과 일방주의가 최선이라는 강력한 윌슨주의로 그를 무장시켰다.
윌슨주의자에게 중요한 건 한반도의 안전이 아닌 세계의 안전이다. 미국이 약점을 보이면 세계가 불행을 향한다고 믿는 부시 대통령이 6자회담에서 ‘악의 축’ 북한에 양보하기를 기대하긴 힘들다. 우리 정부가 원하는, 미국도 한 발짝 물러서는 북핵 문제 해결법은 민족자결주의만 믿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3·1운동과 다름없이 비현실적이다.
학교에선 우리가 백의민족이라는 것도, 하늘이 푸르다는 것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땅 좁고 부강하지도 않은 약소국이라는 점도 일러줘야 할 필요가 있다.
부끄러워할 건 약소국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이를 최대한으로 활용해 국익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현실이다. 나폴레옹은 그 나라의 지리를 아는 게 외교정책을 간파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강대국간 힘의 균형을 뒤흔들 수도 있는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하기는커녕 동북아 중심을 자처한 채 주어진 밥상도 걷어차며 빈주먹만 휘두르고 있다.
▼약소국의 妙, 왜 못 살리나 ▼
윌슨은 살아 있다. 민족자결주의로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세계를 안전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은 어디든 개입하는 헤게모니로서 엄존한다.
이 현실이 부당하고 마음에 안 든다고 민족자결 자주국방 자주외교를 부르짖는 게 현명하다고 할 수는 없다. 차라리 핵을 무기로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는 북한이 교활하리만큼 현명하다. 강대국이면서도 국가 안전을 미국에 맡기고 경제를 챙겨 온 일본, 미국의 실체를 인정하는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며 실리를 다지는 중국은 더 현명하다.
순수하다고, 몰랐다고 용서받을 수 있는 건 학생 때뿐이다. 힘과 능력이 없으면 지혜라도 있어야 한다. 국제정세를 외면한 채 허황된 용꿈에 빠져 있다가 변방의 이무기로, 지렁이로 주저앉는 건 시간문제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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