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임채정칼럼]‘올 아웃 1년’

  • 입력 2004년 2월 17일 19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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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아직 불법대선자금 문제로 조사조차 받지 않았다. 그런데 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만나 “나도 피고석에 있다”고 했을까. 피고는 민사재판용어이므로 문맥상 피고인석이 맞을 것이나, 어쨌든 그가 이 사안과 관련해 이보다 직설적으로 속내를 내비친 적은 없다.

범법혐의로 법원에 기소돼야 피고인 신분이 된다. 수사대상일 뿐인 피의자보다도 ‘죄와 벌’에 가까운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대선자금은 법적 문제 이전에 도덕적 정치적 문제이고, 도덕과 정치의 영역에선 피고인이라는 용어가 적절치 않다. 고백성사나 대국민사과 때 “나도 피고인이다”고 말하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가. 실정법상의 무죄추정원칙에 기대려 하지 않는다면, 그냥 “저도 죄인이로소이다”고 말하는 게 더 호소력을 가질 것이다.

▼기진한 정권, 사라진 링컨 ▼

1주일 뒤면 현 정권 출범 1주년이다. 지난 1년간의 난정(亂政)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어떻게 될까. 피고석이든 피고인석이든 그 자리에는 의당 노 대통령이 맨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잘못했다’는 응답이 ‘잘했다’는 응답의 곱절이나 되는 여론조사 결과가 곧 국민의 공소장인 셈이다. 총선 올인은 그러한 낭패감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정치권과 언론에서 통용되고 있는 올인 역시 국정용어로는 부적절하다. 아니 부당하다. 영속성과 안정성이 보장돼야 하는 국정을 노름판에 빗댈 수야 없지 않은가. 더욱이 국가의 미래가 걸린 정책을 판돈 취급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하지만 1년 동안 거의 모든 것을 잃고 마지막 카드를 던질 수밖에 없는 ‘올아웃’ 정권의 다급한 현실이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용어를 유포시키고 있으니 어찌 하랴.

몇 가지 명세만 뽑아 봐도 현 정권의 신용상태는 극히 불량하다. 첫째, 노 대통령의 이른바 옛 ‘동업자 그룹’ 다수가 비리연루 혐의로 상처를 입었으니 개혁 올아웃이다. 둘째, 사사건건 부닥치지 않는 일이 없을 정도로 보혁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으니 통합 올아웃이다. 셋째, 생산설비와 투자자들은 한국을 빠져나가고 청년백수와 신용불량자들만 거리에 넘쳐나니 경제 올아웃이고 민생 올아웃이다.

넷째, 특진이 걸린 선거사범 단속에 경찰력이 집중되는 바람에 강력범죄가 급증해도 속수무책이라니 치안도 올아웃 위기인 모양이다. 다섯째, 대선자금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안팎으로 싸움질만 계속하고 있는 정치는 올아웃된지 이미 오래다. 당연히 야당도 난정의 공동피고인으로 민의(民意)의 법정에 서는 것을 면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은 원칙과 신뢰가 무너진 노 대통령의 리더십 올아웃이다. 그가 그토록 닮고 싶어 한 미국의 링컨 대통령을 거론하는 게 뜸해진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재선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순조로운 정권이양을 위해 미리 국무위원 전원에게 경쟁자인 민주당 대통령후보에 대한 충성서약을 받아두었던 링컨의 모습을 떠올리기가 그리 편치 않을 듯싶다.

현 정권은 그동안 이런저런 로드맵을 쏟아냈지만, 오히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어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남쪽 초나라에 간다면서 북쪽으로만 간다는 뜻의 지초북행(至楚北行)이라는 고사는 그대로 행선지를 잃어버린 한국사회에 대한 풍자다. 길에서 만난 행인이 “그리 가면 안 된다”고 일러줘도 “내 말은 좋은 말이고, 말몰이꾼은 뛰어나다”며 고집을 피우는 고사의 주인공이 더욱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

그래서야 로드맵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다. 총선 이후를 전망하기 두려운 것도 같은 이유다. 누가 이기든 나라를 어디로 이끌어갈지 알 수 없다면 총선 전이나 후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이쯤 되면 정작 올인하고 싶은 사람들은 상심한 국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채청 편집국 부국장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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