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김일영/리멤버 2003, 不姙의 시기

  • 입력 2003년 12월 25일 18시 29분


코멘트
역사 속에서 2003년은 어떻게 기록될까. 우왕좌왕하다가 시간만 보낸 불임(不姙)의 시기로 남을까, 암중모색하면서 때를 기다리던 회임(懷妊)의 기간으로 평가될까.

2월 노무현 정부는 경제 여건이 좋지 않은 가운데 원내 소수파라는 한계를 안고 출범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 정부가 내놓은 해법은 ‘국민 참여’와 ‘균형 발전’ 그리고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 건설’이었다.

▼‘일은 않고 말만 많았던’ 1년 ▼

문제는 지난 1년 동안 이러한 구상과 관련해 각종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로드맵만 난무했지 실제 이루어진 일은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 정부를 가리켜 ‘NATO’, 즉 ‘일은 않고 말만 많은(No Action Talk Only) 정부’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 건설’과 ‘균형 발전’은 상충되는 점이 많다. 전자가 시장원리를 기초로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정치적 고려가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노 정부는 6월경부터 갑자기 ‘2만달러 시대’라는 또 다른 슬로건을 들고 나와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투자와 내수가 얼어붙고 청년실업자가 넘쳐나며 생계형 자살자가 속출하는 경제상황에서 이런 구호는 국민에게 공허한 말잔치로 여겨질 뿐이었다. 실제로 이런 계획들은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결여돼 있었으며, 현 정부의 정책적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지난 1년 동안 노 정부가 그나마 활력을 보여준 것은 ‘국민 참여’ 부문이다. 이 정부는 네티즌의 파워를 정치적으로 동원해 집권에 성공한 최초의 정권답게 각종 국정 현안은 물론이고 심지어 인사문제에 대해서도 국민, 보다 정확히는 네티즌의 의견을 구했다. 이것은 잘될 경우 디지털시대의 새로운 참여모델을 보여줄 수도 있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디지털 포퓰리즘’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더 짙게 보여주고 있다.

포퓰리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리더십을 개인적 캐릭터에 크게 의존하는 지도자가 의회나 정당 같은 대의제도를 우회해 대중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노 정부는 원내 소수파이고,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민주당을 포함한 기성 정당을 모두 불신하고 있으며, 영향력이 큰 일부 언론과도 불화관계에 있었다. 이런 노 정부가 ‘국민 참여’라는 이름 아래 대의제도를 우회해 대중과 무매개적 관계를 맺는 수단으로 사이버 공간을 활용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디지털 포퓰리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참여 과정에서 노 정부와 ‘코드’가 맞는 네티즌들이 사이버공간의 익명성에 기대어 기성질서에 대해 보여주는 ‘분노의 정치(politics of anger)’는 포퓰리즘의 공격성과 파괴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국민 참여’가 낳은 가장 우려할 만한 결과는 대통령이 이해가 충돌하는 주요 국정 현안에 대해 참여와 공론청취라는 미명 아래 자신이 해야 될 결정을 미루고 있다는 점이다. 대의 민주주의에서 국민 참여가 지도자의 결정을 대체할 수는 없다. 국가적 주요 사안에 대한 책임자의 결정이 적시에 이루어진다는 전제하에서 사이버공간에서의 참여가 적절하게 활용된다면, 그 결과는 디지털 참여민주주의로 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가 지도자의 우유부단함과 무능을 감추는 수단으로 활용되거나 대의제를 무력화하고 기성질서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면, 그것은 디지털 포퓰리즘으로 귀착되고 말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난 1년간 우리 정치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가능성을 농후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

▼철저한 반성으로 ‘역전’ 준비해야 ▼

현 시점에서 볼 때 노 정부 1년의 성적표는 회임보다는 불임의 시기에 가깝다.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의 1년을 보는 국민의 마음도 안타깝다. 그러나 최종 평가는 아직 이르다. 노 정부에는 이런 평가를 뒤집을 수 있는 4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전은 올 한 해에 대한 철저한 반성 위에서 가능하다. 이 점에서 노 대통령은 ‘리멤버 12·19’에 참석해 동지들과 한 해 전의 감격을 나누기보다는 ‘리멤버 2003’을 개최해 각계 인사들로부터 쓴소리를 들으면서 내년의 역전을 준비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 iykim@skku.edu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