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공개서한,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 입력 2003년 6월 6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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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띄운 공개서한은 누구에게 보낸 것일까. 형식상 수신인은 노 대통령의 전 후원회장 이기명씨이지만 내용을 읽어보면 진짜 수신인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언론 얘기가 주를 이루니 1차 수신인은 언론이겠고, “부당한 의혹 제기에 의해 형벌을 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으니 2차 수신인은 검찰이겠으며, 이를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했으니 최종 수신인은 국민일 듯싶다.

사실 노 대통령이 이씨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만 표하고자 했다면 서한을 공개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점에서 의도가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경기 용인시 땅 매매의혹을 줄기차게 파헤치고 있는 언론의 입을 틀어막고 야당이 촉구하고 있는 검찰의 수사 착수를 저지하기 위해, 그리고 지지 세력을 향해 자신의 딱한 처지를 호소하기 위해 대중선동적인 방식을 동원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든다.

아직 의혹의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부당한 의혹 제기’라고 단정할 수 있나. 언젠가 의혹의 일부나마 사실로 드러날 경우 노 대통령은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새로운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는 불투명한 상황에서 언론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고 이씨를 위로하는 공개서한을 보낸 것은 우선 경솔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서한에 나타난 노 대통령의 공인관과 언론관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대통령 측근은 공인이고, 후원회장을 지낸데다 대통령특보로 내정까지 됐던 이씨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일반인과 똑같은 기준을 적용해 언론의 실명 거론을 비난하는 것은 법조인 출신답지 못하다.

강제수사권을 가지지 않은 언론이 확인되고 검증된 사실만 보도할 수는 없다. 언론에 수사기관 같은 엄격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언론은 오랜 세월에 걸쳐 확립되고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직업윤리와 건전한 상식에 입각한 보도로 독자의 신뢰를 받아왔다. ‘아니면 말고’식의 의혹 제기라는 노 대통령의 말은 언론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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