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영언/'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 입력 2003년 4월 15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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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대통령 수석비서관 및 보좌관 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참모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 모든 국정을 주도하는 듯한 인상을 줘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말씀을 좀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그렇게 하면 일이 되느냐”고 가볍게 응수했다.

노 대통령 취임 후 50일간을 돌아보면 확실히 말(言)이 넘쳐났다. 격식을 따지지 않고 어디서나 말하기를 좋아하는 데다 토론을 즐기는 성격에, 집권초기라는 시기적 요인도 겹쳤을 것이다. 여론은 나뉜다. 한쪽은 ‘솔직해서 좋다’는 것이고 또 한쪽은 ‘불안하다’는 것이지만 걱정 쪽이 더 많아 보인다. 쏟아내는 말들이 잇따라 논란거리를 만들고 이 과정에서 대통령의 위엄은 서서히 금이 가고 있는 모습이다.

노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로 불리는 부산의 송기인(宋基寅)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은 아랫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게 하고, 또 그 말을 들어야 한다. 대통령이 말을 많이 하면 아랫사람들이 말을 못하게 되고, 결정의 폭도 좁아진다.” 한마디로 ‘이제부터는 말하기를 줄이고 대신 듣기를 많이 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송 신부의 얘기를 들으며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로 이루어진 어린 시절의 국어공부가 떠올랐다. 노 대통령은 이 중 아마도 말하기 점수가 높았을지 모른다. 달변에 다변인 그의 특성을 생각할 때 그런 상상이 가능하다. 주장이 많고 강할수록 설화(舌禍)는 극성을 부린다. 듣기 읽기 쓰기에 신경을 쓰면 당연히 말의 성숙도는 높아지고, 사고와 행동은 균형을 이루게 된다.

우선 듣기는 민심을 파악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다. 특히 귀에 거슬리는 이견(異見)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내편’ ‘네편’을 나눠 한 쪽의 얘기만 듣는다는 항간의 우려가 사실이 아니어야 한다. 노 대통령은 ‘바른 정치란 곧 청치(聽治)’라는 옛말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요즘 노 대통령은 인사편중시비 개혁불안논란 측근비리문제 등으로 마음이 몹시 무거운 것 같다. “국민의 정부가 겪었던 여러 가지 실패의 과정들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불안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 취임 50일 소회가 그의 심경을 잘 말해준다. 대통령이 받는 스트레스는 국정의 생산성 저하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기 쉽다. 이럴 때 일수록 필요한 것이 정신적 심리적 안정이다. 독서는 생각을 가다듬는 해결 방법일 수 있다.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은 모든 말들이 마찬가지지만 특히 대통령의 말은 뒤집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역대 정권에 걸쳐 대통령이 취임 초반에 했던 말 한마디 때문에 임기내내 발목을 잡힌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대통령의 말은 사전에 문서화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쓰기가 중요한 까닭이다.

마침 노 대통령이 내각의 역할 강화를 다시 강조하고 나섰다. 일반적인 정부업무는 국무총리나 장관이 하고 대통령은 국가적 과제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약속이 꼭 지켜져 대통령이 듣고 쓰고 읽는 생산적 시간을 좀 더 많이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의 입이 한 개인데 귀나 눈이 두 개인 이유는 말은 적게 하고 듣고 읽는 것은 두 배로 하라는 뜻이라고 하지 않던가.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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