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權암흑' 떠도는 탈북자]①중국서 동남아로…끝없는 유랑

  • 입력 2003년 4월 1일 18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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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 중국-베트남 산악 국경을 도보로 넘어 중국에서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도착한 탈북자들이 ‘좀 더 안전한’ 남쪽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러 가고 있다.  -하노이=성동기기자
언제쯤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 중국-베트남 산악 국경을 도보로 넘어 중국에서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도착한 탈북자들이 ‘좀 더 안전한’ 남쪽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러 가고 있다. -하노이=성동기기자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헐벗고 굶주리며 인권을 유린당하다 마침내 북한을 탈출하는 탈북자 문제가 국제적 문제가 되고 있다. 예전 탈북자들은 중국 몽골 등에 머물며 한국행 기회를 찾았으나 최근에는 동남아 국가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83주년 특집으로 북한의 핵개발 및 한국 ‘햇볕정책’의 그늘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탈북자의 인권 실태를 조명하는 시리즈를 7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를 통해 베트남과 태국의 탈북자 실태와 북한 인권에 관한 국제적 관심, 탈북자들을 돕는 비정부기구(NGO)의 활동과 애로점,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의 빛과 그림자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계획이다.》

33월 24일 저녁 무렵 베트남과 인접한 중국 남부의 한 국경지대. 사흘 전 중국 공안의 검문검색을 피해 중국 산둥(山東)성에서 황망히 남행에 나선 초라한 행색의 탈북자 3가족 10명(남자 2, 여자 8명)이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리자 일행은 현지 지리에 밝은 안내인을 따라 가파른 산을 넘기 시작했다. 산 속엔 초병도 철조망도 없었지만 언제 공안이 덮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안내원이 손전등을 켰다. 마침내 베트남이었다. 저만치 산 아래에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밀입국 안내자의 트럭이 보이자 또 한번 ‘사선(死線)’을 넘었다는 안도감에 일순 긴장이 풀렸다.

이들 일행은 25일 하노이에서 만난 기자에게 중국에서 베트남 국경을 넘기 직전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며 여전히 두려움과 긴장에 떨었다.

일행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해 기차와 자동차를 번갈아 타고 때로는 걸어서 40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중국 국경을 거쳐 베트남으로 넘어온 터라 모두들 탈진한 상태였다.

이들은 밀입국을 안내하는 한 베트남인이 서툰 중국말로 “이곳만 넘어서면 베트남”이라고 말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고 말했다.

97년 탈북 후 두 번이나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 강제로 북송됐던 전력이 있는 조경애씨(45·여·가명)는 국경을 넘기 전 ‘아아, 무사히 저곳을 넘어 살길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입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족쇄에 채워진 채 끌려간 북한에서 그는 강제 북송된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구타와 노역, 사상교육에 시달리며 죽음보다 못한 삶을 견뎌내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요행히 중국으로 다시 탈출했으나 탈북자 색출에 혈안이 된 중국 공안을 피해 깊은 산골에서 숨어 지내는 나날이 계속됐다. 한번은 인신매매꾼이 한밤중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하마터면 딸과 함께 네이멍구로 팔려갈 뻔한 일도 있었다.

하노이에 온 탈북자 10명은 25일 대우호텔 바로 옆에 있는 한국대사관을 둘러봤다. 몇 차례의 기획망명의 여파로 중국 내 외국공관 주변엔 경비가 삼엄해졌지만 베트남의 한국공관은 다를 것으로 기대하고 중국 국경을 넘었기 때문이었다.

일행 중 유일한 성인 남자인 강영수씨(40·가명)가 먼저 4층에 한국대사관이 있는 대형 빌딩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1층에서부터 경비원이 가로막고 신분증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말도 통하지 않아서 그냥 두리번거리다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막막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약간의 수고비를 받고 국경 통과를 도와준 베트남인은 행운을 빈다는 말만을 남기고 이미 떠난 뒤였다. 북한과 외교적으로 가까운 베트남에서 공안에게 체포되는 날이면 중국을 거쳐 북송될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겁이 덜컥 났다.

유일한 희망은 탈북을 돕는 비정부기구(NGO) 관계자의 연락처뿐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과도 만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피곤에 지친 일행이 NGO 관계자를 찾아 하노이의 낯선 거리를 헤맨 지 몇 시간. 커다란 보따리를 멘 초라한 행색의 이들은 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느끼며 이곳저곳을 수소문한 끝에 정말 천우신조로 NGO 관계자 박모씨(37)를 만났다.

이들을 찾아 온 박씨는 “하노이는 위험하니 일단 ‘안전한 지역’으로 이동한 뒤 한국으로 가는 길을 찾아 보라”며 탈북자 일행의 손에 기차표 10장을 쥐여 주었다.

박씨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앞으로 다른 나라로 갈지도 모르니 부디 몸조심하길 바란다”고 당부하자 탈북자 일행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미순양(14·가명)은 “엄마, 또 국경을 넘어야 하는 거야”라며 울먹였다. 다른 일행도 목숨을 걸고 찾아온 베트남이 안전한 곳이 못된다는 사실에 크게 낙담했다.

“이 넓은 세상에 우리가 굶주리지 않고, 마음 편히 다리 뻗고 쉴 수 있는 곳이 이렇게 없나요.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아보고 싶은 우리의 생각이 잘못된 것인가요. 우리가 한국에 가서 살 수 있게 제발 도와주세요.”

저 먹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삶을 위해 북한을 탈출한 지 여러 해.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떠돌이로 중국을 유랑하다 베트남까지 온 이들 탈북자 일행은 밤차로 또 다른 기회의 땅을 찾아 남쪽 도시로 떠났다. 이들은 그곳에서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몰래 공동생활을 하다 인접국가로 떠난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베트남 내 행선지와 다시 어느 나라로 갈지는 비밀에 부쳐졌다.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본인들도, NGO관계자들도 몰랐다.

하노이=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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