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壤 2003년 봄]'聖地' 만경대에도 가판점 등장…격세지감

  • 입력 2003년 3월 25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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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신석호기자
평양=신석호기자
《지구 건너편에서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북한을 인도적으로 돕고 있는 사회복지법인 굿네이버스(옛 한국이웃사랑회·회장 이일하)의 대표단 100명이 21일부터 3박4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청와대대변인의 대북경계 수위 조정 발언으로 방문기간 한때 긴장감이 흐르기도 했지만 북측 초청자인 민족화해협의회는 대표단을 목장 병원 학교 등 굿네이버스 사업장들과 평양 지하철 등 북측 여기저기로 친절하게 안내했다. 신석호 본보 경제부 기자가 동행 취재했다.》

굿네이버스 대표단 100명은 24일 평양을 떠나기 전 마지막 일정으로 평양시 평천구역의 부흥역에서 평양 지하철을 탔다.

다음 역인 영광역에 내려 출구를 향해 계단을 올라서자 한 여성 판매원이 ‘매대’(간이 매점)에서 ‘평양메트로’라는 영문 안내책자를 권당 1달러에 판매했다.

평양시 순안공항의 면세점. 지난해 10월 방북했을 때보다 상품의 종류가 다양하고 수량도 많아졌다. -평양=신석호기자

지난달 영광역을 찾은 남측 인사들은 이 매대를 보지 못했다. 한달 만에 새로운 돈(외화)벌이 수단이 등장한 것이다.

북한이 지난해 7월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시작하면서 기업소 협동농장 봉사소(판매시설) 등 경제주체들에는 더 많이, 더 잘 생산해 더 많은 수입을 올리는 것이 덕목이 됐다.

지난해 10월 미국과의 핵 갈등이 시작되고 외부 지원이 줄어들면서 북한 경제 회복에 대한 비관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5개월 만에 다시 북한을 찾아 북측 안내로 둘러본 곳에서는 변화의 증거들이 보였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벌자=대표단이 21일 방문한 김일성 주석의 만경대 생가구역 한 귀퉁이에서는 한 여성 판매원이 매대를 열고 빵과 과자 음료 등 가벼운 군것질거리를 팔고 있었다.

이곳은 북측 주민들이 성지로 신성하게 여기는 곳이어서 초라한 매대를 보는 것은 의외였다. 안내원은 “만경대 사적관리소가 급한 손님들을 위해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냉면 맛이 좋은 대동강변의 옥류관은 냉면을 먹고 나가는 손님들에게 ‘옥류관이 파는 음식 15가지’의 조리법을 담은 CD를 팔았다. 역시 지난해 10월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남측 인사들이 쇼핑을 하는 대성수출품전시장은 1층 한쪽에 있던 다방을 없애고 그 자리에 디지털TV와 전자기기를 들여놓았다.

양문수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40)는 “외화난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사람들에게서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인다”고 말했다.

같은 날 개선문 주변에서는 중년 여성 2명이 길거리에 그림판을 걸어놓고 현지 주민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광경을 목격했다. ‘거리의 화가’가 등장한 것이다.

아직 봄바람이 차가웠지만 평양역 주변엔 10개 이상의 간이 매대가 보였다.

이번이 네 번째 방북인 김석산 한국복지재단 회장(62)은 “지난해 아리랑축전 때보다 길거리에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외지인의 유로화 사용은 대체로 정착단계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유로화 잔돈이 모자라면 중국 인민폐나 달러를 내주는 곳도 많았다.

대성수출품전시장 계산대 위에 있는 3월 19일자 환율 표에서 미국 달러는 맨 아래의 자리를 차지했다.

▽봄맞이 단장도 한창=3월과 4월은 북한 전역의 ‘봄철 위생월간’이어서 곳곳에서 봄맞이 단장이 한창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가로수 밑동에 하얀 석회가 칠해졌다. 이렇게 하면 봄을 맞아 땅속의 나쁜 벌레와 균이 나무 위로 오르지 못한다고 안내원이 설명했다.

21일 고려호텔 뒤편 1층 건물에는 일꾼들이 부지런히 파란색 페인트를 칠했다.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마을 꾸리기’에 동원된 학생들과 여성들이 긴 빗자루를 들고 다녔다.

▽에너지 부족은 심각한 듯=평양시내의 두 화력발전소는 쉴 새 없이 흰 연기를 뿜고 있었지만 전력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아 보였다. 21일 도착한 순안공항에서는 가방을 검색하는 컴퓨터 두 대에 전기가 들어왔지만 전등은 모두 꺼졌다.

이날 주체사상탑은 엘리베이터가 운행을 멈춰 아무도 전망대에 오르지 못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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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戰 발발직후의 평양거리

▼南北 화해 키우는 인도적 지원사업▼

“두 전문가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일하는지 모릅니다. 제약공장이 완공된 뒤에도 두 분을 영원히 기술 고문으로 추대하겠습니다.”

전영란 정성제약연구소 소장(54·여)은 23일 남측 제약설비 전문가들이 그려 온 항생제용 주사제 생산 설비 도면을 보면서 ‘열정적’이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썼다.

이명수 일성기공 사장(46)과 황지연 한미기계 사장(45)이 북측 주민들에게 싸고 좋은 약을 공급하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해준다는 것.

이들과 함께 주사제 공장을 만드는 일은 굿네이버스가 지난해 시작한 새로운 분야의 인도적 지원사업이다.

북한은 의약품과 생산 기술이 크게 부족하다. 필수 의약품을 자급자족하기 위해 북측 민화협이 굿네이버스에 도움을 구했고 굿네이버스가 두 사람을 찾아낸 것.

이날 두 전문가는 기계 설비에서부터 경영 전반에 걸쳐 북측 직원들이 알기 쉽게 설명했다. 상대방은 꼼꼼히 메모했다.

1995년 북측 주민들에게 먹을 것을 지원하며 시작된 굿네이버스의 인도적 지원사업은 현재 축산 아동복지 의료 교육 등의 분야로 넓어지며 큰 성과를 내고 있다.

이번에 대표단이 둘러본 구빈리협동농장 삼석닭목장 대안젖소목장 정성제약연구소 안과병원신축현장 평양제2인민병원 평양육아원 등 10여곳을 포함해 북한 전역에 30여곳의 사업장이 있다.

굿네이버스는 지난달 모란봉제1중학교 등에 시청각 교육기자재 1000대를 지원했다. 이 학교 김동실 교장(54·여)은 “학생들 교육에 큰 도움이 돼 늘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 단체의 홍보대사로 방북한 가수 유열씨는 “남북의 화해와 협력과정에 민간단체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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