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청와대 사칭'이 일어나는 이유

  • 입력 2003년 3월 24일 18시 44분


코멘트
최근 잇따라 발생한 청와대 참모진 사칭 사건은 ‘해프닝’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우선 아무도 금전적 물리적 피해를 보지 않았고, 이름을 도용당한 청와대 인사가 엄정조사와 처리를 요구했다는 점에서 실패한 사기사건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광재 국정상황실장측이 일부 공기업과 산하단체장에게 ‘새 정부 국정철학에 맞춰 단체운영 구상을 e메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대부분 착실하게 회신을 보내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마침 단체장의 비리 내사와 교체가 거론되는 민감한 시기였다. 조사 결과 민간인 김모씨가 상황실 직원을 사칭해 개인적으로 한 일로 나타났다지만, ‘우광재 좌희정’으로 불리는 대통령 최측근 국정상황실의 요구를 거부할 공직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 됐다.

이호철 민정1비서관을 사칭해 통관 과정에서 압력을 행사한 사건은 다행히도 해당 관청에서 확인을 한 덕분에 적발이 됐다. 그러나 만의 하나, ‘청와대’라는 말 한마디에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정치문화가 자리잡는다면 확인 작업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게다가 e메일은 공문서나 전화와는 달리 수신자와 발신자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특성이 있다. 인터넷 정치를 시도하는 새 정부는 주요한 국가 정보가 이같은 ‘e메일 사기’를 통해 오갈 수도 있음을 유념하는 계기로 삼기 바란다.

새 정부 출범 한달도 안돼 청와대 사칭 사건이 잇따른 것은 청와대로의 권력 집중 현상이 과거 정권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정부가 바뀌어도 끈질기게 나타나는 이같은 권력층 사칭 사건은 변칙과 특혜가 통하는 어지러운 세태를 반영하기에 더 참담하다. 더구나 청와대 조직은 ‘효율성’을 추구하기 위해 한층 비대해졌다. 대통령이 원하든 원치 않든 ‘측근 정치’로 비치는 정권운용 방식이 청와대 사칭 사건을 더욱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