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정부 2·27組閣/파격인선 3人]'비주류 40代' 권력 중심으로

  • 입력 2003년 2월 27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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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뚜껑이 열린 노무현(盧武鉉)정부의 첫 내각 명단에는 ‘40대 트리오’가 포함돼 있다. 각각 법무부 행정자치부 문화관광부 장관에 파격적으로 발탁된 강금실(康錦實) 변호사, 김두관(金斗官) 전 남해군수, 이창동(李滄東)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이들이다. 이들이 관련 부처의 수장에 임명된 것은 단순한 세대교체 차원을 뛰어넘어 기존 주류와 비주류간 역관계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강금실 법무부장관▼

강금실 새 법무부 장관(46·사법시험 23회)에게는 ‘첫’이라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강금실(46·사법시험 23회) 새 법무부 장관에게는 ‘첫’이라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서울지역 첫 여성 형사단독판사, 첫 여성 로펌 대표, 첫 여성 민변 부회장에 이어 이번엔 건국 이후 첫 여성 법무부 장관에까지 올랐다.

지인들은 그를 “열 남자도 못 당할 여자”라고 입을 모은다. 일에 대한 열정과 추진력 등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 그가 소속 변호사 32명 규모의 법무법인 ‘지평’의 대표로 활동하면서 민변의 부회장을 맡고,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법률자문단원이면서 부패방지위원 역할까지 녹록지 않게 해내는 것도 바로 이 때문. 지난해 8월엔 세계경제포럼(WEF)이 선정한 ‘차세대 한국인 리더 18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경기여고 문과를 수석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강 장관은 교내 탈춤반 활동을 하면서 사회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83년 판사로 임명된 그는 서슬 퍼렇던 5공화국 시절에도 불법시위 혐의로 검거된 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잇따라 기각해 화제를 모았다. 93년 ‘사법파동’ 땐 ‘평판사회의’ 설립을 주도하고 김덕주(金德柱) 당시 대법원장에게 사법개혁 건의서를 올리기도 했다.

학창시절 자주 찾던 광화문의 ‘민중문화사’ 서점 주인의 소개로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전력이 있는 서울대 철학과 출신인 김태경씨를 만나 4년 열애 끝에 84년 결혼했다. 김씨가 출판사와 여행사 등을 확장, 운영하다 95년 부도가 나자 5년 뒤 이혼했다. 그러나 결혼시절 남편이 남긴 10억원대의 빚을 갚아주느라 지금도 언니가 사는 연립주택에 얹혀 산다. 시와 영화를 좋아하는 문학소녀 같은 측면도 있다고 지인들은 전했다.

하종대기자 orionha@donga.com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김두관 행정자치부장관▼

‘마을 이장, 군수에서 일약 장관으로.’

내무 담당 장관으로는 정부수립 후 최연소인 44세에 장관에 오른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의 이력서다.

김 장관은 1985년 군에서 제대한 뒤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개설한 민족학교에 입학하면서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86년 집회에 참가했다가 3개월간 옥살이를 한 ‘이력’도 있다.

87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경남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에 귀향한 그는 ‘남해 농민회’를 조직했고 88년부터 3년간 이장을 맡아 농민운동을 확대했다.

88년 진보정당인 ‘민중의 당’ 남해 하동지구당 위원장을 맡으면서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낙선했고 이후 지역 도서관인 ‘책 사랑 나눔터’를 만들고 지역신문인 ‘남해신문’을 창간하는 등 활동무대를 넓혔다.

본격적인 행정경험은 95년 첫 지방선거에서 37세(전국 최연소)로 남해군수에 당선되면서부터. 98년 재선되며 군을 이끌었다.

큰 무대로 나서기 위해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남지사에 출마했으나 16.9%를 득표하는 데 그쳐 실패했다.

그는 남해군수 시절 연공서열을 깨는 인사를 단행하고 주요 사업 결정에 주민을 참여시키는 ‘민원공개법정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또 군청 내 150여평 관사를 헐어 민원인 주차장으로 바꾸고 군수실 벽을 유리로 교체해 투명하게 개방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해 1998년 환경운동연합으로부터 녹색공무원상을 받았다. 16년 만에 서울 생활을 다시 하게 된 그는 27일 “나이 든 간부들은 선배님 형님처럼 잘 모시고 나이 어린 후배에게는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일하겠다”고 말했다.

이현두기자 ruchi@donga.com

▼이창동 문화부장관▼

변영욱기자
서울 신일고 이창동 교사가 신문지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중편소설 ‘전리품’이 가작으로 뽑히면서부터. 87년에는 안정된 교사생활을 때려치우고 소설가로 전업해 ‘소지’(87년) ‘녹천에는 똥이 많다’(92년) 등 2권의 창작집을 냈다. 96년 금호그룹 창업주 고 박인천 회장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소설 ‘집념-길 위의 길’을 쓴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93년 마흔이 다 된 나이에 덜컥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영화는 박광수 감독 밑에서 ‘그 섬에 가고 싶다’를 만들면서 배웠다. 박 감독은 “한번은 촬영장 근처에 두엄이 많이 쌓였지만 인부를 사서 치울 형편이 못돼 고심하고 있었는데 이 감독이 앞장서 두엄을 치우다 허리를 다쳐 큰 고생을 한 것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97년 ‘초록물고기’로 성공적인 데뷔를 했고 2000년 ‘박하사탕’으로 흥행에도 성공했다. 작년 ‘오아시스’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해 명성도 얻었다. ‘이창동표’ 영화의 사실성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많으나 “필요 이상으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부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불편해하는 이들도 있다.

충무로에서는 “절정기에 들어선 좋은 감독 하나를 잃었다”며 아쉬워하면서도 훌륭한 문화장관이었던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나 그리스 여배우 멜리나 메르쿠리를 거론하며 그의 장관임명에 기대를 표명했다. 문화부 내에서는 체육, 청소년, 관광분야까지 포함된 다양한 업무를 제대로 처리할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그와는 선후배로 20년 지기인 작가 신경숙씨는 “이 선배는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고 소신이 강하다”며 “그의 성실함과 꼼꼼함에 기대를 건다”고 말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직은 휴직할 것으로 알려졌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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