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대통령 취임사 뒷 이야기…감동보다 논지 · 초안 3번 작성

  • 입력 2003년 2월 25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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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사는 논리적이고 논지는 명확했으나 감동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집필 관계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취임사 초안은 모두 세 번 작성됐다. 초안마다 무게중심에 차이가 있었다. 1차 초안은 국내 개혁에 초점을 맞췄다. 2차 초안은 동북아 번영과 남북한 평화공존 등 대외문제에 비중을 뒀다. 3차 초안은 앞서 두 개의 초안을 적절히 결합시켰다. 동북아 시대에 대한 언급을 취임사의 앞쪽에 둘 것이냐, 뒤쪽에 둘 것이냐에 대해 논란이 있었지만 ‘노 대통령의 화두’처럼 제시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앞쪽에 넣었다.

3차 초안이 최종안으로 제출된 것은 17일. 노 대통령은 18일 하루 동안 이를 검토했다. 취임식 1주일 앞서 취임사를 마무리지은 것은 취임사의 영문번역을 위한 시간이 필요해서다. 취임식 하루 전날인 24일 취임사를 받아본 집필 관계자들은 ‘변한 내용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즉흥 연설을 선호하는 노 대통령이어서 글로 쓴 연설원고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 초안 작성 초기에 집필 관계자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작년 민주당 국민경선 후보수락연설 등 일부 전해지는 연설원고와 그의 저서인 ‘노무현이 만난 링컨’ 등을 참조해 초안 작성에 들어갔다. 외국 대통령들의 취임사에서 보는 감동적인 연설문에 대해 잠시 고민했으나 집필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의 뜻을 반영해 감동적인 것보다 간결 명료한 데 무게중심을 뒀다.

연설문의 서두인 ‘국민 여러분’ 앞에는 ‘존경하는’이라는 수식어만을 사용했다. 역대 대통령의 취임사에 꼭 등장했던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표현은 완전히 사라졌다. ‘친애’라는 말은 어딘지 권위주의적인 구식의 느낌이 난다는 공감이 형성됐기 때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한번 사용했던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도 한때 검토됐으나 유치하다는 평을 받았다.

노 대통령이 국내 위인 중 가장 좋아하는 백범 김구 선생의 말을 인용하는 문제도 검토됐다. 김구 선생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품격 높은 문화국가가 되는 것이다’는 표현은 한때 초안에 들어갔으나 최종안에서는 빠졌다. 김광규 시인의 ‘희망’을 인용하는 것도 검토됐으나 이 역시 포함되지 못했다.

취임사는 대외 문제에 관해서는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할 것인지, 체제안전과 경제지원을 약속받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든가 ‘어떤 형태로든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어서는 안된다’든가 하는 대목은 각각 북한과 미국 내 강경파를 향해 분명한 의사를 전달하고 있다.

반면 국내 문제에 대해서는 ‘반칙’ ‘기회주의자’와 같은 함축적인 표현을 주로 사용했다. 1차 초안을 만들 당시만 해도 소위 ‘언론개혁(?)’까지도 구체적으로 넣어야 한다는 어느 집필 관계자의 주장도 있었지만 취임사에 세세한 문제까지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일찍부터 배제됐다.

취임사의 핵심 독트린이라고 할 수 있는 ‘평화번영정책’은 용어와 개념을 모두 인수위 외교안보팀에서 만들어 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평화번영정책’은 너무 딱딱한 전문용어의 느낌을 준다

‘햇볕정책’과의 차별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조어(造語) 능력은 상당히 떨어지는 느낌이다.

동북아 중심국가 부상의 근거를 밝힌 부분이 많이 빠져 약간 비약된 부분도 없지 않다. 당초에는 취임사에 포함된 ‘한반도가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다리’라는 지정학적 이유 외에도 서울 상하이 베이징 도쿄 블라디보스토크 등 동북아 5대 도시에서 서울이 모두 최단거리에 있다는 지경학(地經學)적 이유, 불교 유교 기독교 등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는 지문학(地文學)적 이유 등도 거론됐으나 취임사에 들어가지는 못했다.취임사는 김종심 저작권심의조정위원장, 김호기 조기숙 교수와 인수위의 임혁백 성경륭 이정우 교수등이 중심이 돼 만들었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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