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 "대통령이 수사 발목잡아" 비판 확산

  • 입력 2003년 2월 4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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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상선의 2235억원 대북 비밀송금 사건에 대해 여권의 핵심 인사들이 던지는 발언은 단순한 의사 표명이 아니라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성을 크게 해치는 ‘수사 개입’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특히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 등의 발언은 곧바로 검찰의 수사 방향이나 수위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수밖에 없어 되도록 자제돼야 한다는 게 법조계 인사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대통령이나 대통령당선자의 발언이 법적으로 검찰 수사팀에 대한 수사 지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검찰청법상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지휘는 검찰총장이 최고 책임자로 수사 지휘라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통령이나 대통령당선자 등 검찰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는 검찰총장의 지시보다 더 수사팀은 물론 검찰 조직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검사장 등 고위인사의 경우 대통령이 승진 및 전보권을 갖고 있는 데다 검사들의 경우도 사실상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는 법무부장관이 전보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판사 출신의 한 중견 변호사는 “김 대통령이나 노 당선자 등의 발언은 위헌적 요소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헌법상 모든 공직자들은 법에 의해 정당한 집행을 해야 하는데, 정당한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수사를 막는 것은 정당한 직무집행으로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김인회(金仁會) 사무차장은 “검찰의 수사 유보 결정은 사실상 정치권의 영향을 받아 내려진 것 아니냐”고 말했다.

실제로 대통령 등 여권 핵심인사들의 발언은 이 사건 수사에 대한 검찰의 태도를 결정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10월 수사에 착수하고도 감사원 발표를 이유로 본격 수사를 미루던 검찰은 노 당선자가 지난달 23일 엄정 수사를 촉구하자 관련자 12명을 즉시 출국 금지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을 시작으로 문희상(文喜相) 비서실장 내정자와 유인태(柳寅泰) 정무수석 내정자 등의 ‘정치적 해결’ 발언에 이어 국회가 판단해야 한다는 노 당선자의 발언이 나오자 검찰은 수사 유보로 다시 방침을 바꿨다.

검찰 출신의 한 중견 변호사는 “고유의 권한과 판단에 따라 수사 여부를 결정해야 할 검찰이 또다시 ‘정권의 시녀’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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