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 개편 논의 '시동'

  • 입력 2002년 11월 10일 18시 52분


《새 정부를 이끌어나갈 대통령을 뽑을 선거일이 한달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정부조직 개편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경제부처와 관련해서는 당사자인 경제관료들은 물론 기업, 학계, 금융계에서도 현행 구조의 문제점을 들면서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행 경제부처 조직의 문제점과 거론되는 개편방안, 정부수립 후 경제부처 개편사(史), 미국 및 프랑스의 실태 등을 소개한다.》

중견 정보기술(IT)업체에서 일하는 A상무는 경제부처 조직 이야기만 나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정보통신부와 산업자원부 눈치를 보느라 시간 낭비와 업무 비능률이 이만저만 아니기 때문이다.

한 은행의 임원 B씨도 불만이 많다. 그는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감독원 예금보험공사 한국은행이 모두 ‘상전’인데다 요즘은 공적자금이 들어갔다고 감사원까지 일일이 간섭한다”며 “감독 및 감사를 받느라 일을 못할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현행 경제부처 조직의 큰 틀은 1997년 외환위기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부산물이다. 그러나 부처간 업무 중복은 물론 최근 한국-칠레 자유무역협정(FTA)과정에서 나타났듯이 제대로 업무조율도 안돼 수시로 혼선과 잡음이 나오고 있다.

세계가 ‘총성 없는 경제전쟁’을 벌이는 현실에서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경제부처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개편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많다.

▽현행 경제부처 조직의 문제점〓최근 정부가 추진중인 부실기업이나 부실금융기관 처리를 보면 누가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주도하는지 혼란스럽다. 재경부 금융정책국, 금감위, 예금보험공사 등이 모두 부실기관에 대해 관여하고 있다.

재경부 고위당국자는 “구조조정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 모든 기관이 내 책임이 아니라고 빠져나갈 수 있도록 되어있는 구조”라며 “만약 외환위기의 징후가 다시 보일 때 누가 앞장서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라고 털어놓았다.

산자부 정통부 과학기술부의 업무 중복도 만만찮다. 벤처 지원자금을 놓고 정통부와 산자부 산하 중기청은 수시로 마찰을 벌인다. 특히 IT분야는 아직 규제행정의 필요성이 높다보니 기업에 대한 서비스보다는 군림하는 공무원이 많다는 지적이다. 한 벤처업체 대표는 “정통부와 산자부 어느 쪽도 소홀히 했다가 ‘괘씸죄’로 찍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지원을 하지 않고 감독만 해도 좋으니 ‘모시는 부처’를 하나로 통일해달라”고 주문했다.

현 정부조직에서 가장 많은 질타를 받는 부문은 통상부문. 마늘협상과 FTA협상에서 여실히 문제점이 드러났다. 협상대표권을 갖고 있는 외교통상부와 직접 이해당사자인 기업이나 농민의 현실에 민감한 해당 경제부처 사이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이밖에 공정거래위원회가 공정거래정책 수립과 집행을 함께 맡는데서 오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비판도 많다. ‘경제팀 수장(首長)’인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있지만 예산기능의 분리로 경제부처들을 효과적으로 조정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현재 거론되는 조직개편 논의 방향〓현재 경제전문가나 민간기업인들이 거론하는 경제부처 조직개편 방향의 큰 흐름은 업무가 겹치거나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 도움이 안 되는 부처를 과감히 통폐합해 ‘작은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구체적인 방향으로는 △대외 협상능력 강화를 위한 통상조직 개편△금융정책 수립과 감독기관의 재편 △거시경제 정책수립과 예산기능 조정 △산업조직 일원화 △공정위의 기능 축소 등이 거론된다.

관련부처간 통폐합의 대표적인 것이 산자부 정통부 과학기술부의 일원화. 박용성(朴容晟)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최근 “미국 장관은 12명인데 한국은 20명이 넘는다”며 “우선 산자부 정통부 과기부를 합치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정통부가 “사실상 산자부로의 흡수통합”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다른 경제부처에서도 꽤 호응을 얻고 있는 방안이다.

부처간 정책 조정력 강화를 위해 재경부의 경제정책 수립기능과 예산처의 예산편성권을 합치자는 방안도 거론된다. 여기에 현 재경부의 세제실까지 합치자는 주장도 나온다.

대신 금융부문을 떼어내 재경부의 금융정책국과 금융감독위원회를 통합하고 산하에 금융감독원을 두는 가칭 금융부 신설론도 일부 있다. 일각에서는 아예 옛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식으로 갈라 ‘견제와 균형’을 하도록 하는 방안도 나온다.

통상조직과 관련해서는 미국의 무역대표부(USTR)처럼 독립조직으로 개편하는 방안과 교섭대표 및 조정기능을 경제부처로 옮기자는 방안, 그리고 현재 제도를 그대로 두자는 방안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이밖에 공정위는 최소한 정책수립과 집행기능을 분리해야 하며 차관급으로 낮춰 재경부 등 경제팀 수장 부처 소속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천광암기자 iam@donga.com

▼정부수립후 지금까지▼


3공화국 박정희(朴正熙)정부에서 6공화국 노태우(盧泰愚)정부에 이르기까지 경제부처의 큰 틀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1961년 생긴 경제기획원이 경제성장을 이끄는 ‘맏형’노릇을 해왔지만 기획원과 재무부 사이의 ‘견제와 균형’은 한 부처의 독주를 막았다.

김영삼(金泳三) 정부는 1994년 12월 경제부처의 두 축인 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 재정경제원을 출범시킨다. 재경원은 기획원으로부터 거시정책수립 예산편성 물가관리 정책조정 대외경제업무를, 재무부로부터는 금융정책 세제 국고업무를 물려받았다. 예산 금융 세제 기획기능을 함께 갖춘 ‘공룡 재경원’ 시대가 열린 것.

YS정부는 또 건설부와 교통부를 통합시켜 건설교통부를 만들고, 상공자원부를 통상산업부로,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개편한다. 기획원 소속이던 공정거래위원회는 국무총리실 소속으로 바뀐다.

YS정부의 경제부처 시스템은 견제와 균형보다는 효율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것. 하지만 이 시스템은 권한의 과도한 집중에 따른 후유증을 낳았다. 특히 경제정책에서 거의 전권(全權)을 움켜쥐었던 재경원은 외환위기 발발에 책임이 있다는 비판도 받았다.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98년 2월 부총리급 재경원을 장관급 재경부로 ‘격하’시키고 예산기능을 대통령 직속 기획예산위원회와 재경부 산하 예산청으로 분리시켰다. 또 통상산업부를 산업자원부로 개편하고 통상기능은 외교통상부에서 맡도록 했다. 이어 4월에는 재경부 역할 가운데 일부를 떼내 금융감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른바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충실한 구조가 만들어졌으나 이 체제는 얼마 못 가 부처간 혼선과 조정기능 부재(不在)라는 치명적 약점을 드러냈다.

이에 따라 DJ정부는 99년 5월 기획예산위원회와 예산청을 통합, 기획예산처를 신설하고 2001년 1월에는 재경부장관을 경제부총리로 다시 승격시켰다. 경제부총리는 경제정책조정회의와 대외경제조정회의를 주관함으로써 재경원만큼은 못하지만 다시 경제부처의 ‘수장(首長)’ 역할을 하게 됐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선진국 사례 살펴보니▼

경제부처 개편론이 나올 때마다 참고해야 할 모델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나라는 미국이다. 또 프랑스도 대통령제 정치체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모델로 자주 꼽힌다.

주한 미국대사관, 주한 프랑스대사관, 신강순(申康淳)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표부 공사 등에 따르면 미국은 대통령을 직접 보좌하는 대통령행정부에 경제자문회의(CEA) 관리예산처(OMB) 정책개발실 과학기술정책실 미무역대표부(USTR) 등이 속해 있다. 예산과 통상을 대통령이 직접 챙기는 셈이다.

행정 각부는 14개로 한국에 비해 단촐하다. 이 가운데 경제 관련 부는 재무부 농무부 상무부 노동부 주택도시개발부 교통부 에너지부 등이다. 이들은 모두 평등한 관계로 한국의 재정경제부처럼 우월적 지위를 갖고 각 부간 이견을 조정하는 부는 별도로 없다.

국가행정조직에 관한 일반법은 없고 각 부는 별도의 근거법에 따라 만들어진다. 이 때문에 부처의 통폐합이나 명칭 변경 등이 거의 없고 각 부는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프랑스는 이와 대조적이다. 정부조직에 관해 법으로 엄격하게 정하지 않고 있어 내각이 교체될 때마다 수시로 바뀐다. 다만 총선 후 행정명령으로 각료수 명칭 서열 임무분담 소속국(局) 등을 규정한다. 8월 현재 프랑스에는 15개의 부처가 있다. 이 가운데 경제 관련 부는 △경제·재정·산업부 △건설·교통·주택·관광·해양부 △농업·식량·수산·농촌부 등 3개로 연관이 있는 부문을 최대한 하나로 묶은 시스템이다.

특이한 점은 각 부를 관장하는 장관급 각료 휘하에 11명의 담당장관과 12명의 처장이 있다는 것. 예컨대 경제·재정·산업부에는 예산·예산개혁담당장관, 산업담당장관, 해외통상담당장관, 중소기업·상업·수공업·자유직업·소비담당처장이 있다. 또 건설·교통·주택·관광·해양부에는 교통·해양담당처장과 관광담당처장이 있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