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核개발계획 파문]美 경수로중단 카드로 ‘北 核포기’ 압박

  • 입력 2002년 10월 20일 18시 45분


미국이 북한의 핵동결에 관한 94년 제네바 합의를 파기키로 결정했다는 뉴욕 타임스 20일자 보도가 사실이라면 북핵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

제네바 합의는 한국 미국 일본과 유럽 등 서방세계가 지난 8년간 추진해 온 대북 포용정책의 가장 중요한 근간이다. 따라서 제네바 합의의 파기는 단순히 북-미관계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대북접근은 물론 한반도문제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지난해 1월 출범 당시부터 제네바 합의의 문제점을 지적해 왔다. 그해 6월 부시 대통령이 대북정책 검토를 마치고 대북대화 재개를 제의하면서 ‘제네바 합의의 이행방안 개선’을 의제의 하나로 예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은 그러나 제네바 합의 파기에 따른 충격파를 줄이기 위해 이를 공표하는 대신에 실질적으로 제네바 합의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대한 책임이 제네바 합의가 깨진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먼저 말한 북한측에 전적으로 있다고 강조할 것임은 분명하다.

제네바 합의가 사문화(死文化)될 경우 미국이 손쉽게 일방적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경수로 완공 때까지 북한에 제공키로 한 연간 50만t의 중유공급을 중단하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경수로 건설공사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는 대신에 중유공급을 책임지고 있다. 따라서 이는 미국이 한일(韓日)과 유럽연합(EU)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중단할 수 있는 사안 중 하나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경수로 건설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라는 국제 컨소시엄 형태로 진행되고 있고, 미국은 사실상 이에 재정적 기여를 하지 않고 있어 미국이 일방적으로 공사를 중단시키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무엇보다 한국 정부는 대북 포용정책과 남북화해의 상징인 경수로 공사의 차질 없는 진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제동을 걸 경우 경수로 사업은 아무래도 중단되거나 최악의 경우 폐기될 개연성마저 있다.

문제는 북한이 이에 대해 어떻게 나올 것인가이다. 북한이 미국의 압박에 굴복해 핵개발을 포기하면 다행이지만 특유의 벼랑끝 전술을 고려하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중유공급은 북한의 전력난을 단숨에 악화시킬 것이고 북한은 이에 반발, 동결시켜놓았던 영변의 원자로를 재가동하겠다고 위협할 수도 있다. 또 플루토늄 폐연료봉을 현재 보관 중인 저수조에서 꺼내 재처리하겠다고 나올 수도 있다.

이 경우 미국은 94년 핵위기 때 그랬던 것처럼 군사적 대응, 특히 북한의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고려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이런 상황까지 가지 않기 위해 미국은 한국 일본은 물론 중국 러시아 등과 긴밀히 협의해서 다각적인 대북 압박과 설득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반도 및 동북아의 현상유지의 주된 틀로 기능해 왔던 제네바 합의체제가 깨진다면 북한이나 미국이나 어떤 선택을 할지 예상하기 어렵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워싱턴〓한기흥특파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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