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YS정권의 JP…때론 실세로, 때론 '견제대상'으로

  • 입력 2001년 8월 31일 17시 24분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명예총재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 및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각각 '한집 살림'을 해본 경험이 있다. JP는 두 사람을 오가며 정권의 일익을 담당했지만 두 사람과의 관계는 크게 달랐다.

YS 정권 시절 JP는 말 그대로 허세(虛勢) 였다. 91년 3당 통합때 내각제 개헌 합의 문서까지 작성했던 JP는 내각제 개헌을 통해 포스트 YS 를 꿈꿨지만 최형우(崔炯佑) 전 의원을 비롯한 상도동계 실세들로부터 끊임없이 견제 받았다. 대선 직전인 92년 총선에서 JP가 이끌던 공화계가 충청권에서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던 것도 JP의 위상을 한층 추락시킨 요인이었다. 심지어 상도동계는 92년 대선승리에 따른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도 JP의 공을 크게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저간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는 JP도 스스로 몸을 낮춰 YS를 깎듯이 모셨다. YS를 홍곡(鴻鵠·기러기) 에, 자신은 연작(燕雀·참새) 에 비유한 언급이 단적인 예. 당 대표시절 청와대 주례보고 때도 철저히 고개를 숙였다. 직함은 여권의 2인자였지만 YS의 '개혁드라이브'속에서 JP의 역할은 '얼굴 마담'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95년 지방선거 직전 최형우 전 의원을 비롯한 상도동계의 '밀어내기'에 격분한 JP는 신한국당을 탈당, 자민련을 창당했고 그해 지방선거에서 충청권 맹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DJ 정권하에서 JP는 정권창출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제2 대주주 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DJP합의 아래 총리추천권과 3∼4개 장관의 임명권을 사실상 쥐고 있었고, 소수정권의 한계를 지닌 DJ의 양보를 바탕으로 심지어 합당 관련 발언을 문제삼아 김영배(金令培)전국민회의 총재대행을 교체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지난 해 4·13총선을 앞두고 DJ의 선거공조 요청을 JP는 거부했고, 결국 자민련은 교섭단체도 못미치는 17석을 얻어 선거에 참패했다. 하지만 국회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 DJ는 올초 다시 JP에게 화해의 손길 을 내밀었고 DJP공조는 복원됐다.

임동원(林東源) 통일부장관의 해임안을 놓고 정면대치 국면에 접어들기 전까지 DJP의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DJ의 일방적인 양보와 인내의 과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윤영찬 김정훈기자>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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