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이산상봉 가족 표정]"살아있어줘 고마워"

  • 입력 2001년 1월 30일 18시 45분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합니다. 반평생 짓누르던 죄책감을 조금은 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공포로로 남쪽을 선택했던 80대 노인이 북에 두고 온 아내와 딸들의 생사를 확인했다. 생이별한 지 51년 만에 북의 아내 김계량씨(79)와 두 딸의 생존을 확인한 허병식씨(83·서울 서대문구 창천동)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고향인 평안북도 삭주군 청수면의 한 철강소에서 일하던 허씨는 6·25전쟁 발발 두달 뒤 임신 4개월째인 아내, 여덟 살 난 딸 등을 뒤로 한 채 인민군에 징집됐고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 중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동료 4명과 함께 탈출해 투항했다.

“판문점에서 북한 관리들로부터 ‘북조선으로 오지 않을 테냐’는 의사확인을 받을 때 북의 가족들 때문에 고민했지만 북한 체제가 싫어 남쪽에 남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59년 현재의 부인(69)과 재혼, 서울 신촌에서 조그만 철공소를 운영하면서 장남 명수씨(45·무역업) 등 3남1녀를 남부럽지 않게 키워냈다. 그럼에도 망향의 한은 지울 수 없어 1, 2차 이산가족 상봉을 지켜보며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한다.

“혼자 아이들 키웠을 북의 아내에겐 미안한 생각뿐이다. 죽기 전에 북의 가족들을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싶은데….”

○…6·25때 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은 국가유공자의 여동생은 북한에서 출신 성분이 좋은 사람만 산다는 평양 대동강구역에 살고 있었다.

동생 강정선(康正善·70·여)씨가 살아있다는 통보를 받은 강진선(康鎭善·76·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씨는 “오빠 때문에 심하게 고생했을 줄 알았는데 참 다행이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민군 징집을 피해 처와 아들을 데리고 평양 근교 처가에서 숨어 지내던 강진선씨는 50년 10월 국군이 평양에 입성한 뒤 치안대장을 맡아 활동했다. 집에도 못 들어가고 파출소에서 치안대원들과 지내기를 40여일.

1·4후퇴 때 남으로 피란 가는 사람들을 챙기느라 정작 자신의 가족은 돌볼 겨를이 없었다. 강씨는 처와 아들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것에 대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다”고 담담히 말했다.

강씨는 동생에게 쓸 편지 첫머리를 ‘미안하다는 말밖에 쓸 말이 없구나’로 시작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고 맏딸이 살아 있다니…. 부처님 감사합니다.”

얼떨결에 북에 두고 온 맏딸 생각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던 최우성(崔禹成·93·인천 부평구 산곡1동)할머니는 30일 딸이 평양에 살아있다는 소식에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최할머니가 55년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남편 박학재(朴學在)씨, 맏딸 순옥(順玉·61)씨와 헤어진 것은 51년 1·4후퇴 때.

‘대동강 다리가 오늘밤 안으로 끊긴다니 아무래도 아들을 의용군에 보내지 않은 당신은 피란 가는 게 좋겠다’는 이웃들의 권유에 5남매만 데리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친척집에 가 있던 남편과 맏딸에게는 아무 연락도 하지 못했다.

“2, 3일만 있으면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부산까지 내려갔던 최씨는 전쟁이 끝나자 서울로 와 동대문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통해 포목점을 마련했고 이를 기반으로 5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보냈다.

그러나 북에 두고 온 맏딸에 대한 그리움은 어찌할 수 없었다. 시집보낼 때 줘야 한다며 최씨가 장만한 한복과 이불만도 세 보따리. 그러나 10여년 전 집에 큰불이 나면서 가족사진 등과 함께 모두 불타버렸다.

최할머니는 “한복과 이불을 다시 장만해 꼭 전해줘야 할 텐데…”라며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한편 당초 102세로 알려졌던 최씨는 주민등록 갱신 때 면서기의 오기로 아홉 살이 더 많게 기록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반병희·하종대·민동용기자>bbhe4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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