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 영수회담 제의]현정권 출범후 5차례 만나

  • 입력 2000년 9월 25일 18시 47분


“영수회담으로 재미를 본 기억이 없다.”

25일 한나라당의 여야 영수회담 제의에 대해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이회창(李會昌)총재가 만나 뭐 하나 현안을 시원하게 타결한 적이 드물다. 오히려 비공개로 하기로 했던 영수회담에서의 발언내용이 후일 공개돼 여야가 감정싸움으로 치달았던 적도 있다.

현 정권 출범 이후 두 사람의 영수회담은 모두 5차례. 98년 11월10일 처음으로 두 사람이 단독대좌했을 때는 민주당(당시 국민회의)의 한나라당 소속의원 영입공방과 ‘총풍(銃風)사건’ 등으로 인해 정국이 파행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또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 시절 발생했던 ‘환란(換亂)’의 원인규명을 위한 경제청문회 개최문제를 놓고 여야가 첨예하게 맞붙었다.

회담에서 경제청문회 연내 개최와 정치관계법 개정 등이 합의됐으나 하지만 그뿐이었다. 청문회개최는 이듬해로 넘어갔고, 정치관계법이 개정된 것은 2000년 2월이 돼서였다. 오히려 98년 12월31일 터진 ‘국회 529호 사건’으로 정국은 급랭했고, 한나라당은 엄동설한임에도 장외로 뛰쳐나가 부산과 마산 등에서 집회를 강행했다.

99년 3월17일 2차영수회담과 2000년 6월17일 열렸던 4차 영수회담에서는 회담에서의 발언내용이 뒤늦게 공개돼 ‘안하니만 못한’ 회담이 돼버렸다. 2차회담에서는 청와대가 한나라당 이총재의 ‘내각제 개헌 반대발언’을, 4차회담에서는 김대통령이 전해준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발언을 한나라당이 공개해 상호 감정싸움을 촉발시켰다.

의약분업 문제로 6월24일 전격 개최됐던 5차 영수회담도 뒤끝은 마찬가지였다. 여야 영수들이 약사법개정에 합의했으나 곧바로 한나라당의 ‘4·13선거’ 부정공세가 이어지면서 합의문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 여야가 파행으로 치달았다. 이같은 전력 때문에 청와대측은 영수회담보다는 여야 중진회담에서 현안이 타결되기를 내심 기대하는 눈치다. 반면 한나라당은 여야 영수가 ‘동격’에 서서 담판을 지을 수 있는 영수회담을 그래도 선호한다.

<윤영찬기자>yyc11@donga.com

*현 정부 출범 이후 여야 영수회담 약사*

일 자현 안주 요 합 의 사 항결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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