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이산상봉]59년 러망명 김여춘교수 '망향가'

  • 입력 2000년 8월 14일 18시 47분


“남과 북에만 이산가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 같은 망명객도 북한에 있는 가족의 생사조차 모른 채 이국에서 40여년을 눈물로 보냈습니다.”

모스크바 고리키세계문학대 김여춘(金麗瑃·72)교수는 헤어진 남과 북의 이산가족이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하면서도 40년 동안 연락이 끊어진 북한의 가족 생각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소련 유학 중이던 59년 북한 정부의 귀국 명령을 어기고 이국의 망명객이 된 뒤 부모님과 형제 등 가족의 생사조차 모르는 자신의 신세가 그의 가슴속에 한스러움으로 메아리쳤던 것.

스탈린 사후인 56년 제20차 소련공산당대회에서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 나오자 당황한 북한은 모든 해외유학생과 ‘의심스러운’ 외교관을 소환했다. 이에 불복하고 당시 이상조 모스크바 주재 대사가 망명했고 김교수와 허진(許眞·97년 작고)씨 등 평소 ‘비판적’이던 7명의 유학생도 같은 길을 택했다. 이들은 한참동안 “돌아오라”는 북한당국의 회유와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김교수는 다음해인 60년 김일성종합대 철학부에 재학중이던 동생 여백씨가 형의 망명 때문에 정치와 무관한 생물학부로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연락을 끊었다.

자신 때문에 가족이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러시아인 친구 등 가끔 북한을 다녀오는 주변사람들이 편지라도 전해 주겠다고 자청해도 사양했다. 혹시라도 북한당국에 발각돼 가족에게 더 큰 해가 돌아갈까 두려워서였다.

러―일 비교문학 분야의 손꼽히는 권위자인 김교수는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평양외국어대 러시아문학과 교수로 있다가 55년 모스크바대 박사과정에 유학을 왔다. 망명 후 음악가인 러시아계 부인과의 사이에 3형제를 둔 그는 이국생활에 익숙해진 90년, 동국대 초청으로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당시 김교수는 6·25 때 월남해 한국에 살고 있던 사촌누이를 35년 만에 극적으로 만나면서 한동안 기억 속에 희미했던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졌다.

살아 생전 고향땅을 밟아보는 것을 거의 체념하다시피 했던 김교수는 최근 남북한의 화해분위기가 높아지면서 “어쩌면 생전에 고향땅을 밟아보고 이미 돌아가셨을 부모님 산소며 형제들을 볼 수도 있다”는 새로운 기대에 마음이 부풀었다. 6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일본 도호쿠(東北)대 교환교수로 일본에 머무르던 김교수는 ‘혹시’라도 기쁜 소식이 나올까 하는 기대 속에 하루종일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김교수는 “이번 8·15 상봉이 남북한의 이산가족뿐만 아니라 분단이후 이런 저런 사정으로 가족과 만나지 못하고 생이별의 아픔을 달래고 있는 모든 이산동포들에게 희망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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