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이산상봉 역사적 날 밝았다

  • 입력 2000년 8월 14일 18시 36분


《산삼 먹이며 고이 키운 아들을 만나러 북으로 가는 아버지, 백일 때 어머니 품에서 생이별한 뒤 처음으로 ‘아버지’를 외쳐 부를 꿈에 부풀었다 마지막 순간에 좌절된 아들.

15일 남과 북의 이산가족 각각 100명이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3박4일 일정으로 휴전선을 넘는다.

교환방문의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이들을 보내고 맞는 가족들, 그리고 역사적 상봉장면을 하릴없이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그 밖의 이산가족들 모두가 가슴 아픈 사연을 갖고 있긴 마찬가지다.

곧 북의 아들을 만나는 최태현(崔泰賢·71·인천)씨와 다시 기약 없이 북의 아버지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신문재(愼文宰·50·미국)씨, 두 사람의 감회는 특히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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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아들 상봉 나선 최태현씨▼

희영아, 알고 있니? 내가 고향 평북 희천의 뒷산에서 산삼 캐올 때마다 아무도 모르게 너에게 먹인 걸…. 네 엄마가 이야기해줬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래, 아버지다. 50년 만에 산삼으로 고이 키운 너를 만나러 간다.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맙다. 방북신청 때 ‘살아 있을까’ 의심이 들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너와 네 엄마, 누님과 남동생 셋이 모두 살아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찌나 몸이 벌벌 떨리던지. 그날부터 잠이 오질 않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길고 긴 세월이었다. 51년8월 스물셋 나이에 인민군으로 남하하다 강원 고성에서 포로로 잡혔다. 수용소에서 3년, 다시 국군에 입대해 3년반을 보내고 제대하니 세상에 혼자만 남더라. ‘갈 곳 없는 방랑자’ 신세가 시작된 거지.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강원도의 탄광을 3년간 전전했다. 한 곳에선 척추를 다쳐 대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때 내 한몸 죽는다는 사실보다 ‘고향 땅 한번 다시 밟지 못하는 게 원통하다’는 심정이 먼저 가슴을 훑어 내렸지. 그 무렵 지금 같이 사는 아내와 만났다.

이제 네 어머니와도 만날 수 있겠구나. 나는 열넷, 네 어머니는 열여섯에 결혼했지. 일 잘하게 생겼다고 동네 사람들이 칭찬 많이 하던 네 어머니다. 만나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남쪽의 아내에게도 네 어머니 얘길 가끔 한다. 그 때마다 야박스럽게 굴더니 진짜 만나러 간다니 어려운 살림에도 금붙이를 잔뜩 내놓더구나. 수십년 동안 나는 실반지 하나 못사줬는데…. 정말 고맙더구나.

희영아. 너도 이제 쉰여섯이구나. 내 머리 속엔 여섯살짜리 꼬마만 남아 있는데…. 어머니 잘 모시고 나오렴. 나도 몸은 비록 꼬부랑 할아버지지만 스물셋 젊은 아빠의 마음으로 널 보러 가마.

▼北부친 상봉 좌절 신문재씨▼

아버님께서 저를 찾으신다는 연락을 처음 받은 이후 지난 한 달은 마치 미국으로 입양된 고아가 50년 만에 생부를 만날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처럼 참으로 가슴 벅찬 시간이었습니다.

아버님을 뵈면 제가 백일 때 아버님과 헤어진 뒤 고생하다 한 점 혈육만 남겨놓은 채 27년 전 홀연히 세상을 떠난 어머님 이야기와 험한 세상 ‘아비 없는 자식’으로 살아 온 제 얘기를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북녘 땅에서 다시 일가를 이룬 아버님 얘기와 배다른 동생들 이야기를 들으며 이제껏 못 나눈 부자의 정을 듬뿍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생전 처음 “아버님” 하고 불러볼 수 있다는 꿈도 잠시, 100명의 서울방문자 최종 명단에서 아버님이 빠진 믿어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혈혈단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고자 이국 땅에 정착한 접니다. 아버님과의 재회의 날은 정녕 저 세상의 어머님 앞에 다시 모일 때뿐인가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아버님 연세(81세)를 생각하면 한시가 급하지만 아버님을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제 모습에 좌절할 뿐입니다. 앞으로도 상봉 기회가 계속되리라는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이산가족의 아픔이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가슴으로 느끼고 나누는 공감대로 승화될 때 통일도 아버님과 제 곁으로 소리 없이 다가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듯 우리의 통일도 어느 순간 예기치 못했던 방법으로 이뤄질 때 아버님과 저를 포함한 1000만 이산가족의 아픔이 그 밑거름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버님, 건강하세요. 저와 만날 때까지 꼭 살아 계셔야 합니다. 저와 아버님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 죄책감과 상처를 딛고 손을 맞잡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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