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남과 북의 이산가족 각각 100명이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3박4일 일정으로 휴전선을 넘는다.
교환방문의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이들을 보내고 맞는 가족들, 그리고 역사적 상봉장면을 하릴없이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그 밖의 이산가족들 모두가 가슴 아픈 사연을 갖고 있긴 마찬가지다.
곧 북의 아들을 만나는 최태현(崔泰賢·71·인천)씨와 다시 기약 없이 북의 아버지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신문재(愼文宰·50·미국)씨, 두 사람의 감회는 특히 대조적이다.》
▼北아들 상봉 나선 최태현씨▼
희영아, 알고 있니? 내가 고향 평북 희천의 뒷산에서 산삼 캐올 때마다 아무도 모르게 너에게 먹인 걸…. 네 엄마가 이야기해줬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래, 아버지다. 50년 만에 산삼으로 고이 키운 너를 만나러 간다.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맙다. 방북신청 때 ‘살아 있을까’ 의심이 들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너와 네 엄마, 누님과 남동생 셋이 모두 살아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찌나 몸이 벌벌 떨리던지. 그날부터 잠이 오질 않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길고 긴 세월이었다. 51년8월 스물셋 나이에 인민군으로 남하하다 강원 고성에서 포로로 잡혔다. 수용소에서 3년, 다시 국군에 입대해 3년반을 보내고 제대하니 세상에 혼자만 남더라. ‘갈 곳 없는 방랑자’ 신세가 시작된 거지.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강원도의 탄광을 3년간 전전했다. 한 곳에선 척추를 다쳐 대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때 내 한몸 죽는다는 사실보다 ‘고향 땅 한번 다시 밟지 못하는 게 원통하다’는 심정이 먼저 가슴을 훑어 내렸지. 그 무렵 지금 같이 사는 아내와 만났다.
이제 네 어머니와도 만날 수 있겠구나. 나는 열넷, 네 어머니는 열여섯에 결혼했지. 일 잘하게 생겼다고 동네 사람들이 칭찬 많이 하던 네 어머니다. 만나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남쪽의 아내에게도 네 어머니 얘길 가끔 한다. 그 때마다 야박스럽게 굴더니 진짜 만나러 간다니 어려운 살림에도 금붙이를 잔뜩 내놓더구나. 수십년 동안 나는 실반지 하나 못사줬는데…. 정말 고맙더구나.
희영아. 너도 이제 쉰여섯이구나. 내 머리 속엔 여섯살짜리 꼬마만 남아 있는데…. 어머니 잘 모시고 나오렴. 나도 몸은 비록 꼬부랑 할아버지지만 스물셋 젊은 아빠의 마음으로 널 보러 가마.
▼北부친 상봉 좌절 신문재씨▼
아버님께서 저를 찾으신다는 연락을 처음 받은 이후 지난 한 달은 마치 미국으로 입양된 고아가 50년 만에 생부를 만날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처럼 참으로 가슴 벅찬 시간이었습니다.
아버님을 뵈면 제가 백일 때 아버님과 헤어진 뒤 고생하다 한 점 혈육만 남겨놓은 채 27년 전 홀연히 세상을 떠난 어머님 이야기와 험한 세상 ‘아비 없는 자식’으로 살아 온 제 얘기를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북녘 땅에서 다시 일가를 이룬 아버님 얘기와 배다른 동생들 이야기를 들으며 이제껏 못 나눈 부자의 정을 듬뿍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생전 처음 “아버님” 하고 불러볼 수 있다는 꿈도 잠시, 100명의 서울방문자 최종 명단에서 아버님이 빠진 믿어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혈혈단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고자 이국 땅에 정착한 접니다. 아버님과의 재회의 날은 정녕 저 세상의 어머님 앞에 다시 모일 때뿐인가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아버님 연세(81세)를 생각하면 한시가 급하지만 아버님을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제 모습에 좌절할 뿐입니다. 앞으로도 상봉 기회가 계속되리라는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이산가족의 아픔이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가슴으로 느끼고 나누는 공감대로 승화될 때 통일도 아버님과 제 곁으로 소리 없이 다가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듯 우리의 통일도 어느 순간 예기치 못했던 방법으로 이뤄질 때 아버님과 저를 포함한 1000만 이산가족의 아픔이 그 밑거름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버님, 건강하세요. 저와 만날 때까지 꼭 살아 계셔야 합니다. 저와 아버님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 죄책감과 상처를 딛고 손을 맞잡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