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고양 '해방촌'/현재 30여가구 살아…

  • 입력 2000년 8월 13일 19시 08분


▼왜 이곳에 사는가▼

“파주 화석정에서 임진강 건너편의 고향땅을 바라보면 철책선 지대로 뒤바뀐 모습이 선명히 눈에 들어와요. 하루 빨리 철책 장막이 걷히고 남북 주민들이 자유스럽게 오가야 되는데….”

목포에서 신의주로 통하는 국도 1호선의 가운데 토막인 통일로와 30여년의 세월을 함께 해온 곽석헌씨(78). 그는 8·15 남북 이산가족들의 만남을 앞두고 남다른 감회에 젖는다.

임진각에서 끊긴 통일로가 북으로 뻗어가려는 것처럼 고향인 경기 장단군 군내면 방목리로 빨리 달려가고 싶은 것이 곽씨의 변함없는 심정이다.

그는 국군이었다 포로로 끌려간 막내동생을 제외하고 처자식, 2남1녀, 형제 등 모든 식구들과 남쪽에 정착했지만 고향을 못잊어 통일로 옆인 경기 고양시 신원동 ‘해방촌’에서 35년간 살아오고 있다. 6·25전쟁 이후 장단군내 10개면 중 5개는 남한쪽으로 편입됐지만 곽씨 고향을 포함한 5개면은 북한 관할지역에 속하게 됐다.

“6·25 전쟁이 터지자 고향땅은 1년 동안 낮에는 남쪽 국군에게 점령됐다 저녁에는 북쪽 인민군의 수하에 들어가는 치열한 접전지역이 됐어요. 당시 부모님은 돌아가셨기 때문에 1·4후퇴 때 친척들과 함께 고향을 등지고 대구까지 피란갔지요.”

그는 전쟁 직후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고된 생활을 했으며 60년 전후 벽돌을 쌓는 미장공으로 건축일에 뛰어들었다. 푼푼이 돈을 모은 그는 65년 해방촌 20여평 부지에 목조집을 직접 지어 ‘내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 곽씨는 “해방촌은 남북통일이 완전히 이뤄져야 진정한 해방을 맞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이곳의 초기 정착민들은 실향민 아홉 가족으로 이뤄졌다”고 소개한다.

현재 30여 가구인 해방촌 주민들은 72년 북측 적십자 대표단을 맞이하는 등 통일로 ‘환영인파’에 등장한 단골들. 72년 9월 곽씨와 함께 북한 대표단에 환영의 손길을 흔들었던 같은 마을 실향민 신영균씨(78)는 “당시 남북간 적대감이 풀리면서 통일이 쉽게 이뤄질 것이라는 희망이 싹터 아주 열렬히 북쪽 사람들을 환영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게 되자 해방촌 사람들은 이후에는 북쪽 대표단을 맞더라도 72년처럼 들뜨지 않고 그저 인사치레로 반기는 수준으로 변하게 됐다.

곽씨는 “85년 고향방문단과 91년 남북고위급회담 때도 통일로에 나가 북측 대표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내심 일이 잘되길 기원했다”며 “이번에는 북쪽의 이산가족들을 따뜻하게 맞고 싶었지만 통일로로 오지 않고 비행기편으로 온다기에 좀 아쉽다”고 말한다. 6·25 때 포로로 잡혀간 동생의 생사확인을 위해 국방부 등을 분주히 오간 그는 “몇몇 특정 이산가족들이 상봉하는 것보다 ‘만남의 광장’을 만들어 이곳에서 수시로 만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향민〓곽석헌(78) 차주현(74) 신영균(78) 박상환(62) 곽정웅씨(60) 등5가족.

▼해방촌 60년대 중반 실향민들 '둥지'▼

‘해방촌’은 통일로 바로 옆 경기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자리잡고 있다. ‘남북통일이 될 때 한민족의 진정한 해방이 이뤄진다’는 뜻으로 해방촌으로 붙여졌다.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면서 서울 남산 밑에 생긴 동네 이름과 똑같지만 남북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60년대 중반부터 실향민 9가족이 주로 목조건물 형태로 둥지를 틀면서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해 72년 남북적십자회담 때 20여 가구로 늘었다. 당시 2차로가 4차로로 확장 포장되면서 큰 변화를 맞았다. 이어

1979년 ‘취락구조개선사업지구’로 지정되면서 대지 50평 규모에 건물을 흙돌집으로 규격화하는 재정비사업이 진행돼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다. 현재 30여가구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고양〓박희제기자>min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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