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미사일 개발 중단'진위]푸틴 '失言'인가 외신 誤報인가

  • 입력 2000년 7월 20일 19시 04분


북한의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19일 저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과연 미사일개발의 조건부 ‘포기’ 발언을 한 것일까. 아니면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를 저지하기 위한 푸틴대통령의 의도가 사실을 과장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일부 외신의 오보(誤報)에 따른 전세계적 해프닝인가.

20일 러시아 외무부와 언론계, 우리 외교통상부 등에 따르면 ‘오보’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보도 경위〓김정일위원장과 푸틴대통령의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인 19일 밤 10시3분(한국시간). AFP통신은 “러시아의 인테르팍스통신에 따르면 ‘북한이 일정한 조건이 보장되면 미사일 계획을 폐기(scrap)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고 푸틴대통령이 말했다”는 기사를 타전했다. 국내 일간지뿐만 아니라 일본 언론 등도 이 기사를 그대로 인용해 크게 실었다.

그러나 푸틴대통령의 기자회견에 참석한 러시아의 이타르타스통신과 관영 RTR방송 등에 따르면 푸틴대통령은 이같은 발언을 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푸틴대통령은 “김위원장이 ‘북한은 평화적 목적으로 로켓기술을 개발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가 평화적인 (위성)발사체 개발기술을 북한에 제공한다면 이를 수용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을 뿐이라는 것. 그는 또 “러시아가 북한에 이 기술을 제공할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에 “왜 러시아만 돈을 내야 하느냐. 북한이 위협적이라고 믿는 나라가 이 계획을 지원해야 한다.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줄이기 위해서 발사체 기술을 북한에 제공해야 한다”고 대답했다는 것. 인테르팍스통신 관계자도 20일 뒤늦게 “우리 기자가 평양 기자회견장에 있었다”며 “우리는 북한의 미사일 개발의 ‘포기’나 ‘폐기’를 운운하는 기사를 출고한 적 없다”고 말했다.

▽정부 반응〓외교통상부는 20일 오전 이 보도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주러시아 한국대사관 등에 전문을 보내 해당 언론사와 러시아 정부 등에 문의하도록 지시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오후 “아직 정확한 답변을 받지는 못했지만 김정일위원장이 미사일 포기 발언을 했다는 정황도, 푸틴대통령이 김정일위원장의 그같은 발언을 옮겼다는 내용도 사실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외교부 북미국 관계자는 “북한은 현재 미사일 연구나 개발이 아닌 수출문제만 놓고 미국측과 미사일협상을 벌이고 있으며 수출 중단의 대가로 3년간 매년 10억달러를 요구하는 실정”이라며 “그런 북한이 미사일개발 중단의사를 밝혔다는 것은 상식 밖이다”고 말했다.

▽북한 미사일의 성격〓북한에 있어서 미사일은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체제 생존을 위한 방어용이고, 다른 하나는 외화벌이 수단.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는 북한으로서는 대외협상수단을 강화하면서 경제적 실리를 버는 카드인 셈.

북한 미사일문제는 단거리와 장거리로 구분된다. 단거리 미사일은 이미 배치가 완료된 상태이고 한반도 전역이 사정권이다. 장거리미사일의 경우 98년 8월 31일 ‘광명성 1호’라고 이름 붙인 다탄두로켓 발사를 통해 내부적 체제결속과 대외협상을 유리하게 진행하는 등의 실리를 얻었다. 김정일위원장은 강성대국의 기치를 이끌면서 금창리 핵의혹시설과 미사일발사로 미국과의 협상을 이끌어냈다. 북한은 이 미사일발사를 계기로 지난 2년간 한국 미국 일본으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아내고 있다.

<부형권·김영식기자·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bookum90@donga.com

▼北미사일 관련 엇갈린 외신보도▼

▽인테르팍스(평양 발)〓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대통령은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을 통해 “김정일국방위원장은 북한의 모든 로켓 개발 계획은 평화적인 목적을 갖고 있으며 외국의 로켓 추진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오직 평화적인 우주개발 연구에만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AFP(모스크바 발)〓방북중인 푸틴대통령은 어떤 조건이 받아들여진다면 평양측이 미사일 개발 계획을 포기(폐기)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고 인테르팍스통신이 보도했다.

▽AP(서울 발)〓평양발 이타르타스통신 보도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북한은 외국으로부터 로켓 추진 기술을 제공받는다면 미사일 기술을 평화적인 우주개발 연구 목적으로만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DPA(평양 발)〓김정일국방위원장과 회담을 마친 후 푸틴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북한을 군사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주변국가들이 로켓추진 기술을 북한에 제공한다면 군사적 위협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푸틴방북 이모저모]北"채무탕감"요청에 러 난색▼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일 오전 순안공항에서 전날 도착할 때와 마찬가지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전송을 받으며 평양을 떠났다. 러시아 이타르타스통신은 수천명의 평양시민들이 거리에서 ‘김정일’ ‘환영 푸틴’ ‘우호는 영원하라’는 등을 연호하며 푸틴을 환송했다고 전했다.

푸틴은 출국하기 직전 평양의 해방기념비를 방문, 헌화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푸틴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은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 구축 계획을 겨냥한 탄도미사일방어협정(ABM) 유지 필요성 등 정치적 군사적 현안에는 손쉽게 의견을 같이했으나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심한 이견을 보였다고 러시아 언론들이 전했다. 특히 양국은 정상회담이 끝난 지 5시간이 넘도록 공동선언을 발표하지 않아 문안확정 과정에서 다소 이견이 있었음을 드러냈다.

러시아 관영 RTR방송은 “북한측이 러시아에 지고 있는 수십억달러에 이르는 채무를 탕감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푸틴이 이를 즉각 거부해 협상이 난항을 겪었다”고 전했다. 북한은 “러시아의 거부 이유가 ‘이념적 차이’ 때문”이라며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부채 완전탕감 요구에 대해 러시아는 북한이 먼저 부채의 3분의 1을 상환한 뒤 나머지 부분에 대해 상환협상을 가질 것을 제안했다고 러시아측 관계자는 전했다. 구소련이 북한에 제공한 차관은 구화폐로 32억루블에 이르며 현재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50억달러가 넘는 것으로 평가된다.

러시아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러시아는 한반도가 통일되면 한국에 북한의 대러시아 채무의 승계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하고 있다.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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