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 北赤명단 포함된 남쪽 혈육들

  • 입력 2000년 7월 17일 18시 53분


▼83년 이산가족 생방송진행 이지연씨▼

“믿어지지 않아요. 50년 동안 기다리다 두달전 실종신고를 낸 오빠가 살아서 가족들을 찾는다니….” 83년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며 이산의 아픔을 느끼게 한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의 진행자 이지연씨(52·여)가 북측 방문단 후보명단에서 6·25전쟁 때 헤어진 오빠 내성씨(68)를 발견했다.

이씨는 17일 서울 대한적십자사를 찾아 오빠의 사진을 확인하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씨는 “6·25전쟁 당시 고교생이던 오빠는 의용군으로 끌려갔다”며 “전쟁 뒤 일본에서 공부중이라는 편지가 와 그 주소로 연락했더니 ‘그런 사람 없다’고 했던 일이 있다”고 소개했다. 1남5녀의 외아들이던 오빠는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통일이 되면 만나겠지’하는 ‘마음 속의 비원(悲願)’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 이씨는 오빠의 월북 때문에 60,70년대에 가족들이 경찰의 감시를 받기도 했지만 50년동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빠를 기다리다 5월에야 고향 군산지법에 실종자신고를 했다고 한다.

이씨는 “83년 생방송을 진행할 때도 울지 않았는데 최근 한 이산가족이 북의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며 우는 모습을 보고 오빠 생각에 펑펑 울었다”고 말했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

▼심혁진씨가 찾는 형 혁정씨▼

16일 밤 자택에서 TV를 보던 심혁정(沈爀鼎·69·서울 구로동)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북측의 이산가족 방문단 명단에 동생 혁진(爀辰·63)씨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발견한 것.

‘죽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진짜 이렇게 살아있다니….’ 혁정씨가 특히 흥분을 감추지 못한 것은 4형제 가운데 큰 형 혁지(爀之·75)씨와 작은 형 혁붕(爀鵬·72), 동생 혁진씨 등 3명이 모두 월북했기 때문.

그뿐만이 아니다. 혁정씨에 따르면 풍산 심씨 집성촌인 김포시 양서면 방화리 능리 부락의 60여 가구 가운데 20여명의 장정들이 9·28 서울 수복과 1·4 후퇴를 전후해 ‘자의반 타의반’ 북쪽으로 넘어갔다는 것.

월북자가 많다 보니 남쪽에 남은 혁정씨 등은 곤욕도 많이 치렀다. 9·28수복 이후 한달 가량 치안대에 끌려가 조사받았고 그 뒤에도 연좌제 때문에 ‘요시찰 보호자’ 등으로 분류돼 감시받아 온 것. 혁정씨의 장조카 천기씨는“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10년 전부터 어머니 기일에 맞춰 제사를 지내왔다”며 “막내 작은아버지가 이번에 아버지의 생존 소식도 갖고 오시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하종대기자>orionha@donga.com

▼연중흠씨가 찾는 친척 경흠씨▼

“중흠이가 서울 온다구유? 나 좀 만나게 해줘유.”

연경흠씨(67)는 월북한 친척 중흠씨(67)가 서울에 올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들은 10촌이자 동갑내기 친구 사이.

경흠씨에 따르면 중흠씨는 당시 청주사범중학교 학생이었고 그가 월북한 것은 ‘삐라사건’ 때문이었다. 피란 중에 라디오에서 ‘연합군이 남쪽에서 진격해 오는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이를 ‘벽보’로 만들어 마을에 붙였다. 당시 마을을 장악 중이던 인민위원회는 곧 중흠씨를 용의자로 지목, “이 자리에서 죽기 싫으면 의용군에 지원하라”고 강권했다는 것.

결국 중흠씨는 부모 형제와 고향을 뒤로 한 채 북으로 갔다. 그는 “지금도 뒤를 흘끔흠끔 돌아보던 중흠이 뒷모습이 생생해유. 월북 안했으면 여기서 ‘큰일’을 했을 텐데…”라고 말했다. 경흠씨는 “한때 중흠이 때문에 조사를 받기도 했지만 중흠이가 오면 바지 둥둥 걷고 마을 앞 개울에서 ‘환영 천렵’이라도 해야지유.”

<연제호동아닷컴기자>sol@donga.com

▼홍삼중씨가 찾는 형 언중씨▼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살아서 우리를 찾는다니….”

북측 이산가족 방문단에 홍삼중씨(65)가 들어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형제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형 언중씨(77·제주시 용담1동)는 “셋째 아들을 가슴에 묻고 돌아가신 부모님께 먼저 소식을 전하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언중씨는 6·25전쟁 뒤 동생의 소식이 전혀 없어 사망한 것으로 생각하고 70년부터 그의 생일에 제사를 지내왔다.

삼중씨는 서울 광신상고 2년 재학중이던 50년7월 학교에 간다며 나간 뒤 행방을 감췄는데 “의용군으로 끌려갔다”는 친구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것. 삼중씨는 그해 8월 이질에 걸려 평양 전염병수용소에 있다는 짤막한 편지를 남기고 연락이 두절됐다. 당시 삼중씨는 큰형 문중씨(작고·5대 국회의원)와 함께 서울에서 생활하며 전교 1, 2등을 다툴 정도로 학업성적이 우수했다는 것. 여동생 신중씨(59)는 “오빠 모습이 생전의 아버지와 너무 흡사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며 상봉의 날을 고대했다.

<제주〓임재영기자>jy788@donga.com

▼유장순씨가 찾는 동생 정례씨▼

“잠깐 갔다가 내일 돌아온다고 했는데 50년만에 연락이 오다니….”

북측 이산가족 상봉 희망자 명단에 들어 있는 유장순씨(68)의 여동생 정례씨(65·인천 강화군 송해면 송내리)는 오빠를 만난다는 설렘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정례씨는 “인민군이 강화에 진입한 뒤 도망다니던 오빠(당시 21세)가 어쩔 수 없이 의용군에 입대하면서 어머니께 ‘잠깐 갔다가 오겠다’며 떠난 뒤 연락이 끊겨 죽은 줄만 알았다”고 말했다.

유장순씨의 가족은 부모와 2남4녀였으나 부모님과 누나 정남씨는 60, 70년대에, 남동생 병숙씨는 95년에 각각 사망했다. 현재 누나 정옥씨(71)와 여동생 정례씨는 강화에, 정자씨(59)는 서울 독산동에 살고 있다.

유씨의 사촌형 병섭씨(72·강화군 하점면)는 “장순이는 위장이 좋지 않아 의용군에서 죽지 않았으면 병사했는 줄만 알았다”며 기뻐했다. 장순씨가 살던 인천 강화군 하점면 이강3리의 집은 장순씨의 부모님과 남동생 병숙씨가 세상을 뜬 뒤 병숙씨의 부인 안영숙씨(61)와 아들 관진씨(34·개인택시기사)가 대를 물려 살고 있다.

<인천〓박정규기자>jangk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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