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증인 이경식-강경식씨 진술내용

  • 입력 1999년 1월 27일 19시 07분


★이경식 전한국은행총재★

―환란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경제팀은 금융개혁법안에만 매달려 결과적으로 당면한 긴급 대처에 소홀했던 것 아닌가.

“그건 필요한 법안이다. 물론 단기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외적인 신인도는 확실히 증가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강경식전부총리와 김인호전경제수석은 스와프나 백업퍼실리티라든지 두세달이 걸려야 돈이 들어올 수 있는 해결방안을 모색하다 실기한 것 아닌가.

“책임을 진 입장에서 마지막 하나라도 점검을 하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IMF로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왜 빨리 안 갔느냐고 하지만 IMF는 처음에는 금기시된 용어였다. 대개의 경우 일본 같은 데 가서 1백억∼2백억달러를 꾸면 어떠냐 하는 정도였다.”

―외환위기를 가져온 원인 중 단기자금 위주의 차입구조가 하나의 원인이라고 보는데….

“하나가 아니라 주요인이다.”

―이것이 증인을 비롯한 당시 정책당국자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책임을 통감한다. 다만 외환 감독체계가 다기화돼 있었다.”

―단기외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 아닌가.

“변명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근본적으로는 우리 경제 전체가 자기 힘에 훨씬 넘어서는 부채경영을 하고 그것을 건전성관리시스템이 따라가지 못하고 거기에 해외쪽의 문이 갑작스럽게 많이 열리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강경식 전경제부총리★

―문민정부 전 기간에 걸쳐서 원화가 장기간 과대평가돼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증인 생각은….

“한마디로 얘기하기는 어렵다.”

―문민정부 들어 원화의 고평가 상태가 지속되면서 경상수지 적자를 초래했고 이는 막대한 자본수지 흑자로 메워지는데 증인도 동의하는가.

“개방경제가 됐을 때 경제를 운영하기 어려운 것이 그 부분이다. 개방이 되면 실물경제와 동떨어지게 환율이 따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증인이 경제부총리로 부임했던 97년 3월이나 늦어도 97년 2·4분기 중에는 환율을 일시에 균형적으로 상승시켰다면 어쩌면 우리 경제가 환란으로 가지 않았을 수도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니었는가.

“부총리에 취임하고 난 다음에는 원화를 고평가된 상태로 운영하지 않았다. 97년 3월 재정경제원 안에서도 일시에 원화를 절하하자는 일부 의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97년 여름이 마지막 기회였고 당시에 특단의 대책을 세웠어야 하는데 고평가된 환율을 지속한 것 아닌가.

“그래서 그 안을 놓고 여러 가지 검토를 해봤는데 시장 실세를 거의 수용하는 수준으로 가자고 해서 부총리에 취임하고 한달 가까이 절하가 됐다.”

―이미 97년 3월 재경원 실무진에서는 대단한 위기를 느끼고 원화절하를 제안한 것 아닌가.

“97년 4∼6월에는 이미 시장에서의 실세를 다 반영했다. 내가 말한 것은 환율변동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때였었다는 것이다.”

〈김정훈기자〉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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